[사설] 무지 무능의 극치 '꽁치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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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과 러시아가 영유권 분쟁지역인 남쿠릴 열도 주변 수역에서 제3국 어선의 조업을 금지키로 합의했다는 언론 보도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정부의 무능력과 외교력 부재에 여론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무능한 정부를 둔 탓에 당장 내년부터 국내 꽁치 수급량의 3분의1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피해 어민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까지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해양수산부와 외교통상부가 일.러간 막후 협상 소식을 두달 전인 지난 8월 초 입수하고도 그동안 손을 놓고 있다 화를 입게 됐다는 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경제적 피해 차원을 넘어 정부의 작동 기능에 심각한 이상이 있다는 신호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다지만 미리 알고도 제때 손을 쓰지 못해 꼼짝없이 피해를 보는 것이라면 정부 내 관계 공직자들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

이번 남쿠릴 열도 꽁치 조업 협상의 실패도 기존 해양수산 외교에서 드러났던 해당 공직자들의 전문성 부족과 책임감 결여, 부처간 공조 기능 이상 등 고질적 병폐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러시아가 남쿠릴 열도 어장의 어획 쿼터를 민간 차원에서 정부 차원으로 배분방식을 변경할 때부터 정부는 이런 가능성에 대비했어야 했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고 냉정하게 짚어볼 줄 아는 전문가들이 관계 부처에 포진해 있었더라면 사전에 충분히 대비책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장관이 바뀌거나 자리를 비우더라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책임감 있는 공직자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이번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위만 쳐다보는 복지부동(伏地不動)과 내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무사안일(無事安逸)이 화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외교교섭권이 없다느니, 해양수산 전문가가 없다느니 하며 해양수산부와 외교통상부가 서로 탓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일이다.

사안의 심각성을 미리 간파하고 국내외에서 두 부처가 머리를 맞대고 손발을 맞춰왔더라면 이런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었을까. 두 부처 사이에 유기적 공조체제가 작동하지 않다 보니 1998년 한.일 어업협정 체결 과정에서 쌍끌이 어업을 협상 대상에서 빠뜨렸던 것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보다 잇속을 따지는 러시아에 대해 정부는 엄중하고 강력한 항의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일본에 대해서는 한.일관계라는 큰 틀에서 이 문제를 다뤄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는 15일로 예정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한을 최대한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 못지 않게 책임 규명도 중요하다. 앉아서 당한 항공안전 2등급 판정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책임 소재를 철저히 가려 일벌백계(一罰百戒)함으로써 적신호가 켜진 공직 기강에 일대 경종을 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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