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엑스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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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100년 전 열린 영국 런던 박람회에 일본은 대만의 원주민을 전시했다. 영국·프랑스처럼 식민지를 가진 강대국이 됐다고 으스댄 것이다. 청·일, 러·일 전쟁에 연거푸 승리한 일본은 그때 이미 박람회를 국력 과시의 마당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여러 나라가 참가하는 국제박람회를 흔히 ‘엑스포’라 한다. 그건 올림픽·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축제다. 연륜에선 엑스포가 대선배다. 올림픽(1896년)과 월드컵(1930년)보다 훨씬 이른 1851년 5월에 태어났다. 영국 런던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린 첫 엑스포는 산업혁명이 낳은 번영과 혁신을 한껏 뽐내는 자리였다. 개막식에 참석한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성대하며, 아름답고 영예로운 날”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앞서가는 나라의 엑스포는 뒤처지는 나라의 배움터였다. 일본의 경우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서양 문물 수준에 깜짝 놀란 사절단, 그중에는 청년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가 있었다. 이 엑스포 청년은 훗날 실업계에 투신해 기업들을 일군다. 그가 오늘날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다.

약소국 조선은 엑스포가 나라의 명줄을 늘릴 비방(秘方)인 줄 알았다. 1893년 미국 시카고 엑스포 때 처음으로 독자 전시관을 세워 나라의 존재를 알렸다. ‘미지의 동방국’ 조선의 전시관은 꽤나 눈길을 끌었나 보다. 엑스포 참가대원의 귀국 보고를 고종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구경하는 사람이 몰려들어 관리자가 미처 응대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이에 물품 이름과 용도를 적어 물품 위에 붙이는 것으로 응대를 대신했다.” 지금 돌아보면 망국으로 가는 길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딱 100년이 지난 1993년, 우리나라는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 대전 엑스포를 개최했다. ‘도우미’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던 그 엑스포 말이다.

요즘 중국 상하이에서 초대형 엑스포가 열리고 있다. 개혁·개방의 성과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자리다. 북한도 여기에 임대관을 얻어 처음으로 엑스포에 참가했다. 그런데 초라하고 단조롭다는 북한관에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씁쓰름하다. 베일에 싸인 폐쇄사회에 대한 호기심이란 거다. ‘은둔국’ 조선의 전시관에 쏠렸던 벽안(碧眼)의 호기심, 그것과는 무엇이 다를까.

허귀식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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