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신불출 (申不出)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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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만담(漫談)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 전파나 LP음반을 타고 전국을 풍미했다. 장소팔.고춘자의 대화식 만담을 추억 속에 떠올리는 이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다.

우리 만담의 원조로는 아무래도 신불출(申不出)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본명 신흥식, 1905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를 겨냥한 정치풍자도 서슴지 않았다.

30년대 초엔 단성사에서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 를 공연하던 중 "동방이 밝아오니 잠을 깨고 일터로 나가자" 는 마지막 대사를 "동방이 밝아오니 대한독립을 위해 모두 떨쳐 일어나자" 로 바꿨다가 종로서에 끌려가 엄청 몰매를 맞았다.

그 후에도 연행.석방이 거듭됐다. 그의 만담 '망둥이 세마리' 는 일본의 도조 히데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풍자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좌파 성향이던 신불출은 해방 후 제 철을 만났다. 이승만이 귀국할 때 무료공연을 열어 환영인파를 분산시킨 사람도 그였다.

46년 '6.10만세운동 기념 연예대회' 에서는 태극기를 놓고 풍자하다가(태극기 모독사건) 우익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다. 만담 내용은 "태극기 중앙의 원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주변에 네 괘(卦)가 있으니, 미국.일본.중국.소련이다. 따라서 (좌익의 주장대로)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는 것이었다.

신불출은 47년 월북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에 뽑히고, 노력훈장에다 공로배우 칭호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의 예술가 기질은 북한의 억압과 통제를 견뎌내지 못했다.

북한사회를 비꼬고 풍자하다 세차례나 구속된 끝에 62년 '복고주의적 반동분자' '종파분자' 라는 이유로 한설야 등과 함께 숙청되고 말았다. 협동농장에 끌려갔다는 게 남한에 전해진 그의 마지막 소식이다.

만담이나 개그는 비유와 은유, 비틀기.뒤집기.낯설게하기 같은 기법이 생명이다. 정치권력은 좋은 소재며, 따라서 통제사회일수록 정치풍자는 발붙일 곳이 없다. 신불출 같은 이는 남한정치가 따돌리고 북한정치가 질식사시킨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연합뉴스(2일)에 따르면 북한 조선중앙통신사가 최근 일반주민용 유머집 '세계유모어' 를 발행해 화제라고 한다. 80년대 말엔 간부용 유머집이 비공개로 출판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는 것이다.

내용이 궁금하지만, 국가기관이 발간한 책이라니 정치풍자는 애초 기대하지 않는 게 나을 성싶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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