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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대 4의 역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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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요즘 한국에서 온 지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이달 초 입사한 일본 신입사원들의 복장 이야기다. 남성은 짝 달라붙는 검은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 여성은 검은색 투피스에 깃이 넓은 하얀 셔츠 차림. 예외가 없다. 이들이 거리에서 몰려다니는 걸 보면 마치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 같다. 신입사원이 ‘교복’을 입고 다니는 나라는 아마 일본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일본 사람들은 이를 당연시한다. ‘요코나라비(일렬로 같이 가는 것)식 사고’ 때문이다. 그들만의 세계다. “튀지 마라”고 어릴 적부터 주입된 교육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톡톡 튀는 역발상, 도전정신이 나오기 힘들다. 나와도 인정받기 힘들다. 위기가 닥쳐도 모두가 딱풀 붙여놓은 듯 움직이질 않고 체념하는 이유다. 하지만 적어도 기자가 일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1980년대 즈음까지만 해도 달랐다.

91년의 일이다. 일본 본토 최북단의 아오모리(靑森)현에 엄청난 태풍이 몰려왔다. 최대 순간 풍속이 53.9㎧에 달했다. 수확기에 접어들었던 사과들이 모조리 사과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통상적으로 예상 수확량의 10%가량이 떨어지던 게 91년은 무려 96%가 떨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였다. 아오모리의 청년 지도자인 미우라 료이치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다. “떨어진 96%의 사과를 보지 말고 남은 4%의 사과를 보자.” 미우라는 남은 4%의 사과에 ‘떨어지는 않는 사과’란 이름을 붙였다. 사과 상자에 ‘풍속 53.9㎧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는 사과’란 큼지막한 문구와 사과나무 그림, 그리고 ‘합격 기원’이란 글을 새겨 넣었다. ‘떨어지지 않는다=합격’이란 연상을 일으킨 이 사과는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폭발적으로 팔렸다. 가격은 순식간에 일반 사과의 30배로 치솟았다. 위기에서 나온 역발상 하나가 아오모리를 살린 것이다.

20세기 일본의 대표적 발명품인 소니의 ‘워크맨’도 역발상에서 비롯된 작품이었다. 79년 막상 개발을 하고 보니 음은 좋지만 녹음기능이 빠진 이상한 제품이 되고 말았다. 실패작을 폐기하려던 참에 “음질만 좋으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차별화되지 않을까”란 역발상이 사내에서 나왔고 이게 받아들여졌다.

한 달 전 인터뷰한 미무라 아키오 신일본제철 회장의 분석은 흥미로웠다. 그는 한국과 중국·일본의 현 기세를 미국 하버드대학의 재학생 수로 비유했다. 졸업한 동문 수로 따지면 일본이 압도적이지만 재학생 수는 중국 400명, 한국 200명, 일본 110명이란다. 게다가 110명의 일본인 재학생 중 지난해 신입생은 딱 1명이라고 한다. 현 일본 사회가 얼마나 내부지향적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스톱워치처럼 멈춰 있는 일본의 시계를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건 결국 탁월한 지도자밖에 없다. 사라진 96을 보지 않고 살아남은 4의 힘을 극대화하는, 역발상의 지도자 말이다. 이는 한국, 나아가 동아시아 번영에도 필수적이다. 남의 나라 흉만 봐서 미안하지만 잔뜩 기대했던 민주당 하토야마 정권이 하도 비실비실해서 하는 소리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