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3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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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제2장 신라명신

하늘을 날아가는 선녀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비천상과 용두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종만이 갖고 있는 특징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당좌(撞座)라고 불리는 종을 치는 부분 옆에 명문(銘文)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가가 유심히 그 명문을 살펴 보았다. 비교적 선명하게 주조된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平十二年 壬申十二月日 靑鳧大寺

鍾百七斤大匠位 金慶門棟…"

명문을 살피고 있는 내게 슌묘가 말하였다.

"대평(大平)이라면 중국의 요(遼)나라의 연호이지요. 대평12년은 고려(高麗)의 덕종(德宗)원년에 해당하는 해입니다. 서력으로는 1032년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이 종은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 만들어진 범종입니다.

이 천년이나 된 조선종이 어떻게 해서 우리 미데라에 건너오게 된 것인지 그 연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새겨있는 '청부대사(靑鳧大寺)' 란 명칭이 오늘날 한국의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라는 학설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청송군에 있던 어떤 절에서 사용되던 종이 우여곡절 끝에 이곳까지 건너온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

슌묘는 종의 겉면을 손으로 쓰다듬고는 말을 맺었다.

"이 범종은 오랫동안 미데라의 금당 내에 비장되어 있었습니다. 예부터 수많은 문인들과 묵객들이 이 종을 보고 수많은 시들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시화들은 지금도 문화관에 진열되어 있을 만큼 이 조선종은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

- 나는 안다.

나는 비록 입을 열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종이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 것일까, 그 연유를 알고 있다. 이 종이 슌묘의 말대로 1032년 김경문(金慶門)에 의해서 주조되었고, 경상북도 청송군에 있는 어느 절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범종이라면 이 종은 그로부터 5백년 뒤에 일어났던 임진왜란때 약탈되어 강제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범종을 보관하고 있는 금당은 1598년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건설된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요토미는 왜군이 노획한 조선종을 자신이 건설한 금당 안에 안치해 두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은 마땅히 우리가 되돌려 받아야 할 귀중한 문화재인 것이다.

- 그러나 알고 있을까.

나는 마음이 착잡하였다.

- 이 조선종이 마땅히 한국으로 되돌려 주어야 할 약탈된 문화재임을 슌묘는 알고 있을 것인가.

슌묘는 사람들이 들어설 수 없는 '출입금지' 의 팻말이 붙여져 있는 구역으로 내려섰다. 그곳은 지하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서부터가 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단구역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지하계단을 밟고 천천히 내려갔다.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금당 안 지하에 따로 수장고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언제나 동일한 기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특수한 장치까지 설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독특한 전통이었다. '신라명신좌상' 만큼 예술적 가치나 국보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없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일본인들은 신체(神體)들을 신성시 여기고 소중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일본에서 '쥐' 를 모시는 신사에서 그들이 신성시하는 어신체를 몰래 훔쳐본 일이 있었다.

그들이 모시고 있는 어신체의 뚜껑을 벗기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쥐의 형상을 본 따 만든 돌조각에 불과하였던 것이었다. 그 쥐 모양의 돌조각을 그들은 신성시하여 신사까지 짓고 그 속에 봉안하고 있는 것이다.

앞장 서 걷던 승려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쩔렁이는 소리를 보아 열쇠였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두터운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은행금고를 연상시킬 만큼 육중한 철문이었다. 승려가 서너개의 열쇠를 사용하여 이어서 번호를 누르는 버튼식 잠금장치를 해제한 후에야 마침내 덜커덩 - 문이 열렸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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