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정치학자 고 윤천주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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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정치학은 이론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실천학문이다. "

지난 8일 별세한 윤천주(尹天柱.80)박사가 1963년 고려대 정경대학장으로 재직 중 공화당 초대 사무총장으로 가면서 논란이 일자 직접 밝힌 정계 입문의 변이다.

그는 '참여파 정치학자' 의 전형이었다. 학자 겸 정치인으로서 한국의 정치풍토를 통렬히 비판했으며 '여촌야도(與村野都)' '준봉투표(遵奉投票)' 등 수많은 정치조어들을 만들어냈다. 학문적으로는 50년대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로 있으면서 행태주의 이론을 연구해 정치학자로선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했다.

고인은 『한국 정치체계 서설』(61년)『우리나라 선거실태』(81년)『한국 정치체계-단극적(單極的) 통치형』(91년) 등의 저서를 통해 국민의식에 따른 정치행태를 규명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이같은 이론적 바탕 아래 그는 평소 "한국의 적당한 투표율은 한국 사회의 중산층 비율과 같은 60% 정도" 라며 "최근 투표율이 떨어지는 것은 권력의 억압이나 금권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의사에 따라 투표하는 성향이 높아졌기 때문이며 긍정적인 현상" 이라고 분석해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고인에게 직접 강의를 들었던 고려대 서진영(徐鎭英.정치외교학)교수는 "그분의 행태주의적 연구를 통해 비로소 선거와 정당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 가능해졌다" 며 "학문과 현실 정치 양면에 크게 기여하신 분" 이라고 말했다.

尹박사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해방 전 일본 도쿄대(東京大) 정치학과를 거쳐 47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 정경대 교수가 됐다.

5.16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공화당 사무총장과 제15대 문교부 장관, 제7대 국회의원(전국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3선 개헌에 반대해 71년 정계를 떠났다.

이후 부산대 총장을 거쳐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겨간 직후인 75년부터 4년 동안 총장으로 재직했다. 서울대 교수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외부영입 케이스로 총장이 된 것은 지금까지도 고인이 유일하다.

이처럼 정.관.학계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삶은 소탈했다.

"학자는 딸깍발이 정신이 있어야 한다" 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산을 한푼도 물려받지 않았다. 생전에 "일본 등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유산" 이라고 말하곤 했다.

43년간 서울 삼선동 한옥을 지키며 한번도 이사하지 않았을 만큼 검소한 생활을 고집했으며, 장관 재직 때에도 국장들을 셔츠 차림으로 장관실에 드나들게 할 만큼 성품이 수수했다.

고인은 말년에도 학술원 회원으로 꾸준히 학회지에 논문을 기고하는 등 학문적 열정을 유지했다.

서울대 황수익(黃秀益)사회대학장은 "지병으로 병원에 다니면서도 주요 정치학 관련 세미나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으셨다" 며 "세미나에 참석해서는 항상 후배들의 견해를 경청했으며 따끔한 지적도 잊지 않으셨다" 고 회고했다.

조민근.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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