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속옷 택배상자에 사이즈 표시돼 민망’ 지적 받고 삭제한 적도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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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1000번 주문해 200번 반품한 고객, 해마다 수십 건의 불평불만을 회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늘어놓는 고객, 구매한 물건의 흠을 깐깐하게 다그치는 바람에 여성 전화 상담원을 울린 고객…. ‘골치 아픈’ 고객을 다독여 ‘현고이사’란 이름의 마케팅 자문단으로 모신 쇼핑업체 경영자가 있다. 이해선(55·사진) CJ오쇼핑 대표다. ‘현고이사(賢顧移社)’란 현명한 고객이 회사를 움직인다는 뜻. 사내 공모에서 나온 이름이다. 품질이나 서비스 개선의 사외이사라고나 할까.

이 대표는 1982년 CJ제일제당에 입사해 빙그레(95년 입사)·아모레퍼시픽(98년)을 거쳐 2008년 9월 다시 CJ 계열의 TV·인터넷 쇼핑 업체인 CJ오쇼핑에 부사장으로 돌아왔다. 지난해에는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현재까지 28년을 마케팅 한 우물만 판 셈이다. ‘메로나’ 아이스크림과 ‘비트’ 세제, ‘설화수’ 화장품 등 숱한 인기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마케팅의 귀재’란 소리를 듣는 데 대해 “고객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따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화장품 회사에 다닐 때 손수 머리 염색과 화장을 해 보면서 소비자 마음을 읽으려고 애썼다. 그때 꾸미는 솜씨가 늘어서인지 50대 중반치고는 차림새가 독특하다. 이마 위로 살짝 빗어 올린 머릿결 한 가닥은 노란색이고, 셔츠 소매에는 커프스 링크를 달았다.

‘현고이사’는 지난해 7월 그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애정 없는 고객은 불만도 없어요. 기업이 고객불만에 애정을 갖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3명의 현고이사는 석 달 임기다. 여기서 활동한 주부 김모(47)씨는 “홈쇼핑에 몰두하다 보니 못마땅한 점을 참지 못할 때가 많았다. 현고이사를 하면서 회사의 말 못 할 고충도 많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고이사를 어떻게 뽑나.

“고객 DB를 뒤져 연간 제안 건수가 10건 이상인 사람 중에서 뽑는다. 고객만족팀이 2주에 한 번씩 만나 의견을 경청한다. 나도 가끔 점심식사를 함께한다.”

-‘발상 뒤집기’를 강조하는데.

“소비재 마케팅의 핵심은 CJ의 슬로건이기도 한 ‘온리원’(Only-One) 정신이다. 나만의 무기를 만들려면 골치를 썩이는 고객의 독한 의견도 들어야 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역발상 덕분에 성공했다.”

-현고이사의 효과는.

“불만이 직설적이고 구체적이다. ‘원피스 사이즈가 잘 안 맞는다’가 아니라 ‘가슴이 달라붙는데 허리는 펑퍼짐하다’는 식이다. 조직이 크면서 신경 쓰지 못한 세세한 잘못까지 캐낸다.”

-제안은 어느 정도 반영하나.

“9개월 동안 굵직한 것만 40여 건을 개선했다. ‘여성 속옷을 배송할 때 택배상자 겉 포장에 속옷 사이즈까지 표시돼 있어 민망하다’는 여성 고객의 지적에 따라 사이즈 표기를 삭제한 적도 있다.”

-향후 운영 계획은.

“불만 청취를 좀더 체계적으로 하겠다. 식품·패션·가전별로 현고이사 자문역을 한 명씩 뽑아 분야별로 자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CJ오쇼핑은 장차 오프라인 시장 진출을 꿈꾼다. 고객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야 한다는 지적이 많아 오프라인 장터를 연내 시작할 생각이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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