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엄승화 '머리카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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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두운 노래의 한 소절을 잃어버리고 우는

머리카락에 술잔과 입술을 묻는다

난, 다시 머리카락에 손톱 발톱을 묻고

이 세상을 바라본다.

- 엄승화(1957~ ) '머리카락'

누군가 거리에서 만났을 때 그 누군가가 말했다. 정릉에 있는 작은 카페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20여년 전 일이다. 엄승화가 차린 카페에 가보지 못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엄승화를 만났었다. 그 인연으로 그녀 초상도 그렸다. '온다는 사람' 처녀시집은 엄승화가 하염없이 머리카락에 손톱 발톱을 묻고 누굴 기다린다. 기다리다 호주로 이민가서 산다는 말도 들었다.

엄승화의 기다림은 카페 나무계단 위에 '현기증' 을 걸어두었다. 계단을 내려와 우악스럽게 들꽃 한뭉치를 뽑을 때 좁은 검정치마가 '걸음을 방해한다' 고 그녀는 '사로잡힌 여자' 에 썼다.

호주에서 살다 몇년 전 여름 홀연히 대학로에 나타났다. 좁은 검정치마, 긴 생머리는 그대로였다. '오디세이아' 에 나오는 오디세이를 기다리는 피넬로페 같은 여자가.

김영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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