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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승자, TV는 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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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AP통신사는 미국 대선에서의 승자와 패자들을 분석한 기사를 썼다. 그중 '인터넷은 승자'이고 'TV 광고는 패자'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공화당 부시 후보와 민주당 케리 후보는 합쳐서 6억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TV 광고비(2000년 대선의 두 배 이상임)를 쓰며 혈투를 벌였다. 긍정적 정책 캠페인 광고보다 상대 비방 광고가 훨씬 많았다. 선거를 혼탁하게 하는 데 불을 지폈다. 혐오감 때문에 역효과를 낸 광고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AP통신이 TV 광고를 패자로 꼽는 것은 엄청난 광고 공세에도 불구하고 2000년 대선과 선거 결과가 달라진 주(州)가 뉴멕시코와 아이오와주 두 곳뿐이라는 데 있다. 6억달러의 구매력이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TV 광고는 인터넷과 달리 일방적 메시지 전달에 그친다는 약점도 있다.

두 후보가 인터넷 선거운동에 들인 돈은 이보다 훨씬 소액이다. 그러나 인터넷과 블로그(네티즌 1인이 운영하는 인터넷 미디어)는 이번 대선을 거치며 위상과 영향력이 크게 격상됐다. 선거자금 모금 및 자원봉사자 규합 창구로서, 또 후보와 풀뿌리 유권자들의 직접 교감 창구로서, 지지자들의 오프라인 소집회 매개체로서 확실한 역할을 해냈다는 평가다. 그래서 인터넷은 '승자'다.

괄목한 만한 것이 인터넷의 모금력이다. 미국의 1996년 대선 때만 해도 인터넷 모금은 0이었다고 한다. 이번 대선에선 무려 1억달러 이상이 인터넷으로 모금됐다. 케리 측은 인터넷에서 8200만달러를 모금하는 새 역사를 썼다. 전체 모금액은 2억4900만달러였다. 인터넷 모금 덕에 케리는 부시의 모금액 2억7300만달러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부시 측은 e-메일을 이용한 '바이러스 마케팅'으로 재미를 봤다.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동성 결혼.낙태 등에 대한 도덕적 가치를 지키자고 자극하며 케리의 노선을 비난하는 e-메일을 거듭 보내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냈다. 부시 측은 또 일하는 여성들이 자주 찾는 사이트 60여개에 '교육은 열정입니다'라는 타깃 광고를 실었다.

후보 사이트에 대해 정치평론가 댄 길모어는 케리 측이 보다 더 유권자들과 쌍방향성이 좋아 유권자들의 의사표시나 후보와의 직접 교감이 컸다고 평가한다. 양측 모두 매일 자체 사이트에 새 내용을 올리고 동영상, 풍자 패러디도 동원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전 선거만 해도 후보 사이트는 자료실 수준이었으나 이번에는 실시간 정보창고 역할을 했다.

정치 관련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 네티즌들의 영향력도 컸다. 케리의 월남전 훈공을 흠집낸 것은 우파 블로거(Blogger)들이었다. 좌파 블로거인 조시 마셜, 우파 블로거인 글렌 레이널드 등은 스타가 됐다. 민주당은 대선 후보 결정 대회장에서 블로거 40여명에게 최초로 기자와 똑같은 취재권한을 주었다.

어쨌든 양측은 인터넷에서 투입 대비 수천, 수만배의 효과를 봤다. 'e-정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민 참여가 활성화된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에 긍정적이다. 정치가 고객마인드를 갖게 되는 계기도 될 것이다. 정치는 인터넷을 통해 시민들의 욕구.소망.분노를 들어야 한다. 케리가 보수적인 복음주의 기독교도를 소홀히 다룬 게 중요한 패인이었다.

한편 미국 라디오는 보수 성향이 대다수여서 공화당 20년 장기집권의 기반이 되고 있다는 분석(심재웅 한국리서치 부장)도 흥미롭다. 라디오 시사 토크쇼의 선거 기간 중 총 방송시간이 보수적 프로그램은 4만1731시간인 반면 진보 성향은 3042시간에 그쳤다고 한다. 구시대 매체라고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김일 디지털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