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쌀 수급대책] 쌀값 떠받치기 1년짜리 선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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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가 29일 발표한 쌀 수급대책은 늘어나는 쌀 재고로 인해 쌀값이 떨어지고 추곡수매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농업보조금 축소방침에 따라 추곡수매를 줄여야 하는 정부로선 재고량을 직접 떠맡기가 어려운 처지라서 민간 수매량을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정부는 ▶추곡수매 등을 통해 보유하고 있는 정부미의 일반방출을 최대한 억제하고▶농협을 동원해 올해 햅쌀에서 재고로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2백만섬 규모를 시가로 매입해 '따로 보관' 하는 방법으로 쌀 수급을 조절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생산량을 조정하는 등 공급관리가 아닌 올해 쌀 시장 안정만을 겨냥한 단기적 수요관리에 치중한 것이다. 따라서 내년 이후까지 다시 쌓일 재고문제를 일단 연기해놓은 셈이다.

◇ 재고 줄이기보다 시간 벌기=이번 대책은 일단 올 수확기에 예상되는 쌀 재고를 최대한 흡수하고 시장과 격리해 쌀값을 안정시킨 뒤 내년 수확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단기 대응책이다.

새로 도입한 수탁판매제와 조정보관제는 시장에 나온 쌀을 사갈 수요가 늘지 않는 상황에서 줄어드는 정부의 추곡수매를 대신할 민간부문의 수매를 늘리기 위한 것이다.

수확기에 벼에 대해 70% 정도의 선도금을 주고 매입한 뒤 이를 시중에 팔아 농가와 정산하는 수탁판매제는 수매시 전액을 지급하는 현 매입방식보다 수매자금 부담이 적어 민간부문에서의 수매를 원활하게 만들 것으로 농림부는 기대하고 있다.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없는 지역의 회원농협의 창고를 이용해 2백만섬을 시가로 매입.보관하면서 올 수확기에 쌀값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고 내년 이후에 단계적으로 시가로 방출하는 조정보관제도 재고가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3조9천억원 지원의 허실=정부는 산지 쌀값 안정을 위해 3조9천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실상을 들어다보면 정부의 직접적 재정지원보다 농협자금 등을 통한 간접적 지원이 많다.

여기에는 ▶이미 예산배정이 끝난 올 정부 추곡수매 자금(1천7천3백86억원)외에▶RPC의 자체 매입자금(1천6백50억원)▶농협의 2백만섬 시가매입에 쓰이는 농협중앙회 자체자금 5천7백억원▶수탁판매제에 따른 벼 매입자금으로 쓰일 농협 상호금융 3천억원이 포함돼 있다.

정부는 농협자금을 활용하되 농협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동원된 자금에 대한 이자(4백80억원)만을 직접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같은 지원방식도 농산물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보조금 지급을 금지하는 WTO규정 위배여부에 대한 논란이 예상돼 정부의 치밀한 대응이 요구된다.

◇ 장기적 대책 세워야=2004년 쌀 시장 추가개방 협상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재고의 원인이 되는 수급관리 개선을 위해 휴경 등 생산조정제의 도입과 쌀값을 인위적으로 높게 지지하는 추곡수매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정환 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쌀 재고는 내년 이후가 더 문제" 라며 "추곡수매 재원을 적극 활용해 쌀값이 떨어지면 농민에게 일정분을 보상하는 쌀값 연동 직접지불제 등을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 주장했다.

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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