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장날 장터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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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유안진(1941~ ) '장날 장터에서' 전문

볼장 다본 사람이

왠지 볼장 덜본 것만 같아

기웃거린 병원 대기실

아직도 내게 팔아야 할 것과 사야할 게 있는가

왜 그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느냐고 자책하다가

실려가는 중환자와 마주쳤다

아직도 모르느냐

장터 아닌 세상이 어디 있으며

장날 아닌 어느 날이 어디 있느냐

가는 날이 장날이고 가는 곳마다 장터인데

아무리 오래 살아도 볼장 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외마디 그의 비명이 고막을 때린다


삶이 장보는 일이라는 시인의 인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볼장 다본 사람'들이 아직 볼장이 남아있다고, 장날을 더 연장해 달라고 흥정하는 병원은 얼마나 활기찬 장터인가? 상한 몸을 일으켜 한 번이라도 더 장을 더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노력들은 또 얼마나 눈물겨운가?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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