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장비 재활용 기술, 네가 효자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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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장비도 쓰기 나름-. 수명을 다한 낡은 장비로 최신 제품을 만드는 공정 기술이 속속 개발되면서 기업들이 투자 부담을 한결 덜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2001년에 자금난으로 존폐의 위기에 몰렸다. 당시 많은 산업 전문가는 돈이 없어 장비를 제대로 사지 못하는 하이닉스가 머지않아 고사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 같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하이닉스는 지난해 3분기 이후 5분기 연속 영업이익을 냈다. 올 3분기 흑자 규모는 2000년 1분기 이후 최대인 5140억원이다. 이 같은 실적을 올릴 수 있던 데에는 사내 공정개선 운동인 '블루칩 프로젝트'가 크게 기여했다. 공정을 개선해 낡은 장비로 생산성을 높이자는 블루칩 프로젝트는 2002년에 시작됐고 하이닉스는 이 덕분에 최소한 1조원 이상의 투자 부담을 덜었다.

하이닉스는 반도체 장비 중 가장 비싼 노광(露光)장비까지 재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노광장비는 비어 있는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첨단 광학장비로 대당 가격이 250억원을 호가한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하이닉스는 2년 만에 0.18미크론급 공정에 쓰이던 낡은 장비로 현재 0.11미크론급 미세회로 D램을 만들고 있다. 반도체 생산성을 90%가량 높인 것이다. 미세회로 기술을 이용할수록 웨이퍼당 반도체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이 회사 임동규 수석연구원은 "쏘나타급 중형 승용차를 만들 수 있는 장비로 에쿠스급 최고급 대형 승용차를 만든 셈"이라고 설명했다.

포스코가 1973년과 76년에 각각 지은 포항 1고로와 2고로는 아직도 쇳물을 왕성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고로는 이미 제 수명을 다한 용광로다. 용광로를 지을 당시 1고로의 수명은 97년, 2고로는 2000년으로 예정됐었다. 그러나 공정 기술과 유지.보수 기술 덕분에 아직 이 용광로들은 퇴출되지 않았다.

포스코 관계자는 "열을 모으는 기술 개발과 함께 내화(耐火) 벽돌의 품질 개선 덕분에 수명을 늘릴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원래 용광로 내에 있는 내화 벽돌은 8년 만에 한번씩 갈아줘야 했지만 요즘은 15년 만에 한번이면 충분하다.

광케이블 생산업체들은 요즘 울상이다. 통신업체들이 설비 증설 없이 기존 광케이블만으로 전송속도와 용량을 개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로텔레콤 박승길 상무는 "예전에는 전송속도를 높이거나 용량을 늘리려면 광케이블을 더 많이 깔아야 했으나 기존 케이블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10의 용량을 보낼 수 있는 회선에 100의 용량을 보낼 수 있는 전송 기술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78년에 완공된 고리 원전 1호기의 수명 연장을 검토하고 있다. 당초 책정됐던 원전 1호기의 수명은 30년. 따라서 이 원전은 2008년 가동을 중단해야 할 처지지만 날로 유지.보수 기술이 나아져 2008년을 넘겨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이 회사의 설명이다. 실제로 미국은 '30년 수명'을 다한 26기의 원자로를 이미 연장 가동하고 있다.

LG투자증권 리서치센터 박윤수 상무는 "과거엔 새 제품을 생산하거나 생산량을 늘리려면 신규 장비가 필요했지만 최근에는 기존 장비를 재활용하는 기술이 발전해 헌 기계로 생산성을 올리고 신제품도 만들어내는 업체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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