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에서] 아랍 형제국들의 팔레스타인 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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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아랍권에서 '영웅'으로 칭송받던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눈을 감았다. 아랍인들은 그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했다.

그러나 그의 발병과 사망, 그리고 장례절차에서 드러난 아랍 정권들의 태도에 상당수 아랍인이 분노하고 있다. 10월 말 발병한 아라파트를 위해 이집트.요르단.튀니지 3국이 의료진을 파견했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인접국인 데다 적지 않은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대선 직전이었던 튀니지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유권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의료단 파견을 지시했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돼도 자국에서 치료하겠다고 나선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부인 수하 여사가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가 치료장소를 제공했다.

장지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나라도 없었다. 장례식에 엄청난 인파가 몰리면서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다. 더욱이 '성지'가 될 아라파트 무덤이 있을 경우 앞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보다 깊이 관여해야 하는 부담감도 있다. 결국 장지가 팔레스타인 내 라말라 자치정부 청사로 결정된 이후에야 이집트는 중동 내 '형님국가'로서 체면을 차리기로 결정했다.

장례식을 당초 국장(國葬)으로 거행하겠다던 이집트 정부는 행사 하루 전날 돌연 계획을 바꾸기도 했다. 결국 민간인 참여를 완전차단한 군장(軍葬)으로 치러졌다. '사상 최다 군중이 모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자 국가적 소요를 우려한 조치였다.

'수억명의 아랍인이 왜 500만명의 이스라엘에 항상 당하나'라고 혹자는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각국 지도자가 종신 집권과 대물림 승계에만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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