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기자의 오토 살롱] 2차대전의 영웅 ‘지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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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요즘 나오는 신차는 전자제품인지 자동차인지 모를 정도로 전자장비가 잔뜩 달려 있다. 대부분 편의장치다. 예전엔 손과 발을 써야 했던 것을 전자적으로 조작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추세를 거부하면서 ‘자연 생활로 돌아가자’는 자동차 브랜드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 승리의 수훈갑인 ‘지프(Jeep)’다. 지금은 사륜구동 SUV를 칭하는 보통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군용 지프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지프 랭글러(사진)의 시트와 사이드미러는 아직도 수동이다. 창문도 불과 2~3년 전까지 손으로 돌려 올리는 방식이었다. 차량 지붕도 손으로 나사를 풀어 연다. 버튼만 누르면 20초 만에 열리는 전동식 컨버터블과는 거리가 멀다.

제2차 세계대전 초 독일은 월등한 기동력을 앞세운 사륜구동 차량으로 미국과 연합군을 압박했다. 이에 미국 국방부는 곧바로 사륜구동 군수차 개발에 착수했다. 목표는 ‘최고속도 시속 80㎞, 차체 무게 590㎏, 적재량 0.25t, 승차정원 3명’이었다. 이 조건에 맞는 군용차 업체로 ‘윌리스 오버랜드’가 낙찰됐다. 윌리스는 1941년 말 미군 및 연합군 부대에 첫 지프인 ‘윌리스MB’를 보급한다. 가벼운 차체와 뛰어난 기동력으로 산악전과 기습작전에서 탁월한 성능을 냈다.

전쟁 이후 군용 지프는 민간용으로 개조됐다. 45년 윌리스는 맵시나게 외관을 다듬은 민간용 ‘CJ(Civilian Jeep)’ 시리즈를 생산했다. 물론 험로 주파 능력과 개성만점 디자인은 그대로 계승됐다. 민간용은 처음엔 농부나 건설현장 노동자가 주고객이었다. 하지만 점점 산악 캠핑카 등 레저용으로 용도가 다양해졌다. 이에 맞춰 디자인도 꾸준하게 바뀌었다.

이처럼 지프는 특별한 고객층을 갖고 있었지만 대중에게 확산되기는 어려웠다. 별도의 운전기술이 있어야 했고 승차감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83년 양산된 ‘체로키’는 성능과 디자인은 살리면서 운전을 쉽게 하는 편의장치를 듬뿍 달아 큰 인기를 끌었다. 전 세계에 패밀리 SUV 붐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지프 전체의 판매를 되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판매 부침을 겪던 지프는 결국 87년 크라이슬러 그룹에 통합됐다. 지프는 현재 연간 10만 대 정도 팔린다.

지난해 미국 빅3인 GM·포드·크라이슬러가 경영난을 겪을 때 많은 브랜드가 매물로 쏟아졌다. 해외 자동차 업체들은 미국 브랜드에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독특한 개성을 지닌 지프는 예외였다. 지프만 떼어 팔라는 요청이 중국 등에서 쏟아졌으나 크라이슬러는 ‘떼어 팔기는 없다’며 새 주인으로 이탈리아 피아트를 택했다. 요즘 피아트가 삐걱거리며 지프의 주인이 또다시 바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주인을 만나더라도 지프의 유전자는 변치 않을 것이다. 그래야 지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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