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24시] 고이즈미의 겉과 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일본인은 두 얼굴, 즉 혼네(本音)와 다테마에(立て前)를 갖고 있다고 한다.

혼네는 속마음, 다테마에는 겉모습이다. 누구나 겉과 속이 다르겠지만 일본 사람에겐 유달리 그것이 뚜렷해 이런 말이 생겼다.

이 말이 생각나는 것은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둘러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의 말과 행동 때문이다.

그는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들이 합사(合祀)돼 있는 이 신사를 지난 13일 참배했다.

그러면서도 참배 직전 "과거 잘못된 국책으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일으켰다" 는 내용의 담화문을 내놨다.

15일엔 "우리나라는 특히 아시아 각국과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 깊은 반성의 뜻을 표시한다" 며 한발짝 더 진전된 '반성문' 을 발표했다.

이것만 보면 고이즈미는 역대 어느 총리보다 솔직하게 과거침략사를 반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담화문이 공허하게 느껴지고,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혼네를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성한다면서 신사 참배는 왜 했는가?"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마음 때문에 전쟁을 미화하는 군신(軍神)의 신사인 야스쿠니를 참배한다?" 등등의 의문이 생긴다.

그의 담화문을 세심히 보면 어느 정도 그의 혼네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참배 후 "A급 전범 등 특정인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모두에게 정성을 바쳤다" 고 말했다. 담화문이 "오늘 일본의 평화.번영이 그들의 존귀한 희생 위에서 세워졌다" 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그는 A급 전범조차 '숭고한' 참배대상으로 생각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설혹 백번 양보해 고이즈미의 혼네를 달리 해석한다 해도 현실에선 우려했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고이즈미 참배로 어느 때보다 힘을 얻은 극우세력들은 15일 야스쿠니 신사에서 '군국주의 망령(亡靈)잔치' 를 벌였다. 신사 참배객도 지난해의 두배 이상 늘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헌법 개정.집단적 자위권 실현 등 극우세력들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질 게 뻔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이즈미는 '과거사 반성에 대한' 자신의 말이 다테마에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그것이 혼네임을 보여줘야 하는 숙제를 갖게 됐다.

그의 앞에는 일본의 침략으로 피해를 본 한국.중국인에 대한 보상, 평화헌법 유지 등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그가 어떻게 대응할지 그 어느 때보다 주목된다.

오대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