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황당한 ‘전교조 선언문 출제’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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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사 시험 문제지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내용은 같지만 문항 배열이 다른 ‘국’책형(型)과 ‘고’책형의 두 종류로 인쇄됐다. 논란이 된 것은 ‘국’책형의 17번, ‘고’책형으로는 7번 문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문들을 시기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이라는 질문 아래 네 가지 선언문을 예시했다. ㉠이제 시대의 진군을 알리는 민주 정의의 횃불이 올랐다. 정의 사회를 구현하고… ㉡우리는 4·13 호헌 조치가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하며…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현될 수 있도록…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한마음 한 뜻으로 전국 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을 위해 힘차게 나아갈 것을….

장년층 이상 독자들은 이미 짐작하겠지만, ㉠은 1981년의 민주정의당 창당 선언문, ㉡은 87년 호헌(護憲) 철폐 국민대회 선언문, ㉢은 76년 재야단체의 민주구국 선언문, ㉣은 89년 전국교직원노조의 발기인대회 선언문이다. 일부 언론에서 이 중 전교조 발기인대회 선언문에 대해 ‘공무원 채용시험 문제에 이념편향적인 단체의 선언문을 인용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식으로 문제 삼으면서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몇몇 수험생은 “공무원이 되려면 전교조 창립 시기와 발기 선언문까지 알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번 9급 공무원 시험에는 14만1300여 명이 응시했다. 6월 24일 발표될 필기시험 합격자 수는 1719명. 무려 82.2대 1의 경쟁률이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어떤 문제가 출제되는지 지대한 관심을 쏟는 것까지는 이해된다. 그러나 나의 얕은 지식과 소견으로는, 한국사 시험 20문항 중 문제 삼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좌편향이고 무엇이 이념 경도란 말인가. 그런데도 일각에서 비판이 대두되자 시험 주무부서인 행정안전부는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국가고시 시험출제 시스템 전면 개선한다’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출제위원 위촉위원회를 만들고 기존 문제은행을 재검토하고 선정된 시험 문제를 잘 감수하겠다는, 뻔한 내용들이다. 블랙 코미디다.

나는 전교조의 최근 행태에 매우 비판적이다. 창립 당시의 초심(初心)을 잃고 이념·노선에 따른 몇몇 계파가 정치투쟁만 앞세우다 학부모·학생, 일반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당초 다짐한 ‘소금’ 역할만 제대로 해주었어도 최근 드러난 교육현장의 온갖 비리나 전직 교육감 부패의 ‘싹’을 미리 막거나 자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전교조가 요즘 비틀거리는 것과 발기 선언문의 역사적 의의는 별개다. 더구나 전교조는 불법 단체도 아니다. 굳이 이번 시험을 문제 삼겠다면 차라리 ㉠ 문항에 대해 따지는 게 낫다. 쿠데타로 들어선 군부정권이 공포분위기 속에서 만든 민정당의 창당선언문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되묻는 게 그나마 이치에 닿는다.

한국 현대사의 양대 기둥은 산업화와 민주화다. 대한민국은 둘 다를 성취한 유일무이한 나라다.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폄훼하는 것이야말로 ‘좌편향’이요 ‘우편향’이라고 비판 받아 마땅하다. 이번 9급 국가직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중앙 각 부처에 배치돼 일할 예정이다. 공무원 노조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노사관계 전반을 다루는 노동부, 교원노조 관련 업무를 맡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전교조 등 우리나라 노조의 역사에 관해 기본 상식은 있어야 일을 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문제 안 되는 문제가 문제 되는 나라. 우리나라가 기껏 그 수준인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