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전국구씨의 계산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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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 전직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편의상 이름은 전국구(錢國區)씨로 해두겠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던 분입니다.

당시 건설업을 하던 錢씨는 당선 안정권의 번호를 받는 조건으로 돈을 냈습니다. 30억원이 넘는 거액이었습니다. 소위 '공천헌금' 이었습니다. 공천을 대가로 한 헌금은 위법이라고 해서 요즘 특별당비란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만 그 게 그 겁니다.

*** 30억원 헌금내고 금배지

당시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이해를 못했습니다. "배운 게 모자라는 錢씨가 돈으로 한풀이를 하나보다"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錢씨의 계산은 달랐습니다. 충분히 수지가 맞는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우선 10억원 가까이를 확실히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게 錢씨의 셈이었습니다. 따져보니 틀리지 않았습니다. 16대 국회의원의 경우 달마다 7백50만원 가량의 세비를 받습니다. 당시 錢씨의 세비는 연평균 5천만원을 넘었습니다. 4년을 모으면 2억원입니다.

보좌진 인건비도 있습니다. 의원 한명은 4급 2명, 5.6.7.9급 1명씩 모두 6명의 보좌인력을 쓸 수 있습니다. 이들의 급여 합계는 연간 2억원 가까이 됩니다. 錢씨는 운전기사.여직원을 포함해 전부 자신의 건설회사 직원들로 채웠습니다.

錢씨 주머니에서 나가던 월급을 국회가 내도록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錢씨는 4년간 인건비 6억원 이상을 챙겼습니다.

후원회도 중요한 환급수단이었습니다. 의원 한명이 연간 3억원까지, 4년이면 12억원을 합법적으로 모금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정치적 영향력이나 인맥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錢씨는 열심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물론 '+α' 도 있었습니다. 국정감사 때나 상임위에서 중요 현안을 다룰라 치면 소관기관이나 관련업계측에서 錢씨를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살살 다뤄달라" 며 봉투를 놓고 갔습니다.

수시로 의원외교란 이름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보너스도 있었습니다. 출장비 나오고 장관급 예우를 받아 공항 귀빈실을 이용하며 현지 주재 공관원을 몸종 부리듯 할 수 있었지요. 錢씨는 그 재미가 국회 상임위에서 책상 쳐가며 장.차관을 꾸짖던 것 못지 않게 스트레스 풀리는 일이었다고 실토합니다.

하지만 錢씨의 속 주판은 다른 곳에서 퉁겨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법안과 예산심의였습니다. 錢씨가 건설교통위나 예결위에서 건설 관련 법규와 예산을 다루면서 '조금만' 방향을 바꾸면 자신의 건설업체에는 적지 않은 이익이 굴러떨어졌습니다. 그깟 후원금이나 세비.봉투는 새발의 피였습니다.

錢씨는 당시 교육위원회에서 학교정원과 관련된 규정 등을 손보면서 자신의 사학(私學)을 무럭무럭 키워가는 동료의원을 보며 "저 친구도 핵심을 아는군…" 하며 감탄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난 정권교체의 혼란 속에서 줄을 놓쳐 재선에 실패한 錢씨는 절치부심, 다음 총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한 베팅으로 반드시 여의도 의사당에 들어가겠다는 게 錢씨의 다짐입니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큰 당이건 작은 당이건 가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당연히 정책이나 노선은 錢씨의 관심 밖 일입니다. 이런 錢씨의 신경을 긁는 소식이 최근 들리고 있습니다.

*** 후원금 ·세비는 새발의 피

헌법재판소가 1인1표로 지역구의원과 비례의원을 결정토록 한 현재 방식은 위헌이라면서 비례대표 공천의 비민주성도 문제삼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밀실에서 돈받고 공천하면 안된다는 얘기" 라는 설명에 錢씨는 일순 긴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錢씨는 선거법 개정을 여야 정치인들이 맡는다는 소식에 안심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금배지를 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을 것" 이라는 게 錢씨의 장담입니다. 錢씨는 "내기 해도 좋다" 고 하는데 과연 錢씨를 17대 국회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김교준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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