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스테이지] 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유재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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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긴 세월 동안 흙과 먼지, 그리고 사람들의 망각 속에 놓여 있던 문화재를 현실의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람.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 유재은(39)학예연구사는 단순한 옛 물건쯤으로 치부됐을지도 모를 유물에 역사성이라는 숨을 불어넣어 일반에 소개하는 '문화재 정형외과 의사' 다.

이들의 작업은 여느 의사들과 다를 바 없다. 먼지가 쌓인 있는 유물을 가져다가 메스를 사용해 오랜 세월만큼 켜켜이 내려앉은 때를 밀어내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X레이를 찍고 판독하면서 간단치 않은 '수술' 을 진행한다.

兪씨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나는 문화재는 일년에 3백여점. 전남 나주시 복암리 유물 더미에서 나온 흙덩어리를 뜯어내고 얻은 우리나라 최초의 물고기무늬(魚形)장식의 금동제 신발, 경주 감은사지 동탑의 화려한 사리함, 경남 창녕에서 국내 최초로 발견된 은실 세공 규두대도(圭頭大刀) 등이 최근 그의 섬세한 손작업을 거쳐 복원됐다.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같이 자리잡고 있는 문화재연구소의 보존과학실 항온항습기에는 9백여점의 유물이 늘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먼저 흙에서 잠자고 있던 유물이 연구소에 도착하면 兪씨의 손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유물의 사진을 찍고 병원의 진료카드에 해당하는 '기록카드' 를 작성한다.

이어 현미경을 들여다 보며 유물의 겉면에 묻어 있는 잡물들을 제거하고 소금기를 빼내는 탈염작업을 한다.

곧 부서질 듯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유물에 약품처리를 해 그 뼈대를 튼튼하게 세우는 1차 경화작업, 옛 상태 그대로의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코팅 등을 하는 2차 경화작업, 마지막 촬영 등을 거쳐 유물은 마침내 햇빛이 비치는 외부로 옮겨져 현세의 사람들과 다시 만난다.

약품 냄새 가득한 보존처리실에서 이들은 '0.1㎜의 차이' 와 다투는 게 보통이다. 금속 유물에 묻어 있는 미세한 잡물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일 현미경을 들여다 보면서 작업을 하는 까닭에 오후 늦은 시각이 되면 눈두덩 근처에 '안경테' 하나가 생긴다.

兪씨와 연구원 3명으로 이뤄진 보존과학실에서는 그래서 '안경 두 개' 가 작업의 고됨을 일컫는 용어가 돼버렸다.

1985년 문화재연구소에 몸담은 지 17년째 유물을 보존처리해 온 兪씨는 아직 미혼.

금속유물처리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그에 대해 연구소 이명희(李命熹) 보존과학실장은 "문화재와 결혼한 것 같다" 고 말한다.

문화재 복원 과정의 핵심에 해당하는 보존처리 분야에 있다가 남들은 대부분 대학과 다른 기관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아직 문화재에 대한 열정으로 그 자리를 튼튼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연구실 직원들의 대우는 사실 초라하다. 그나마 실장과 兪씨만이 정규직일 뿐 나머지 3명의 연구원은 일당 2만6천원의 임시직 대우다.

하지만 이같은 열악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兪씨는 자신의 직장을 떠날 생각이 없다.

"내 손을 거쳐 복원된 유물이 제대로 보관돼 있는 상태를 전시장 등에서 직접 볼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 " 보다 나은 직장을 왜 찾아가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글=유광종.사진=장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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