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명예회장의 발자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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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7일 타계한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명예회장은 세계 역사상 손꼽히는 언론경영인이었다. '언론계의 여제(女帝)' 라는 칭호도 누렸다.

미국잡지 '배니티 페어' 는 1997년 10월호에서 그녀를 '세계를 움직이는 65인' 의 하나로 꼽았다. 여성은 엘리자베스 영국여왕 등 4명뿐이었다.

그의 '파워' 를 워싱턴 포스트는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지난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녀의 저택 만찬에서 워싱턴 유력인사들과 상견례를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두번 초대받았고, 클린턴 대통령도 1992년 당선 후 초청받았다. "

언론경영인으로서 그는 2000년 세계언론인협회(IPI)가 선정한 '세계 자유언론 영웅 50인' 에 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들었다.

그의 파워는 자신과 워싱턴 포스트라는 일류지의 권위로부터 나왔다. 권위는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지켜낸 언론자유와 자신의 흠결없는 인격 덕분이었다.

1971년 포스트는 베트남전 수행과정을 담은 국방부 문서를 보도할 것인가를 놓고 기로(岐路)의 고민에 빠졌다. 리처드 닉슨 정권은 압력을 넣었다.

67년 문서의 기안을 지시했던 로버트 맥나라마 전 국방장관은 CNN의 추모특집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미첼 법무장관이 그레이엄 여사에게 '당신들이 갖고 있는 방송국 허가권을 빼앗겠다' 고 위협했다. 그렇지만 그레이엄은 공익봉사라는 의무감으로 보도했다. 그레이엄은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 중 한사람이다. "

포스트 역사처럼 그레이엄 개인사도 드라마였다.

33년 뉴욕의 금융재벌이던 아버지 유진 마이어는 지방신문 워싱턴 포스트를 경매를 통해 82만5천달러에 사들였다. 시카고대 졸업 후 포스트 기자로 일하던 그레이엄은 신문사에서 변호사였던 남편 필립 그레이엄을 만났다. 45년 아버지는 사위에게 최대주주 자리를 넘겨주면서 신문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다. 남편은 여기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요구했다.

그레이엄 여사는 훗날 자서전에서 "나는 남편과 신문사를 모두 잃을 뻔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고 회고했다.

63년 8월 우울증을 앓던 남편이 권총으로 자살했다. 신문경영을 맡은 46세의 그레이엄은 포스트와 독립언론의 성장에 자신의 후반부 인생을 걸었다.

97년 그녀는 자신과 워싱턴 포스트, 그리고 자신이 교류했던 유명인사의 얘기를 담은 자서전 『개인사(Personal History)』를 펴냈고 이 책으로 그녀는 다음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워싱턴=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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