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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소주공장 설립규제·대형화 … ‘값싼 알코올’ 대량 생산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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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의 술도가. 마당 가득 술을 만들기 위한 지에밥이 널려 있다. 증류주 한되를 만드는 데에는 대략 쌀 한 되가 든다. 여기에 시간과 노력, 정성이 추가되니 증류주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1890년대 말부터 희석식 소주가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소주 값은 비쌌다. 희석식 소주 값이 크게 떨어진 것은 1920년대 화학적인 주정(酒精) 추출법이 개발된 이후였다. (출처:『사진으로 본 서울의 어제와 오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제례(祭禮)는 술을 따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술이 ‘접신(接神)의 매개물’이 된 것은, 술 취한 사람은 ‘범인(凡人)’의 경지를 넘어 ‘초인(超人)’이 되거나 심하면 ‘비인(非人)’이 되기 때문이다. 술 취한 사람은 신선이 될 수도 있고 ‘개’가 될 수도 있다. 술의 ‘신성성’은 술을 담는 용기(容器)에도 표현됐다. 병 중에 가장 비싸고 좋은 병은 술병이고, 잔 중에 제일 아름다운 잔은 ‘술잔’이다. 술을 빚는 과정에도 여러 금기가 따라 붙었고, 술을 마시는 방법에도 복잡한 규칙이 생겨 아예 ‘주도(酒道)’로까지 승격되었다.

인류가 처음 술을 접한 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 덕이었다고 한다. 자연 발효한 과실이나 벌꿀 등을 먹고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한 고대인들이 술을 빚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수천 년간, 인류가 마실 수 있었던 술은 10도 내외의 ‘묽은’ 술뿐이었다. 발효주를 증류하여 독한 술로 정제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은 아라비아의 연금술사들이었다.

우리나라에 증류주 제조법이 전래된 것은 고려 말이었다. 알라·알카에다·알자지라처럼 ‘알코올’도 아랍어다. 일제 강점기까지도 민간에서는 소주를 흔히 ‘아락기’ 또는 ‘아락주’라 하여 무의식중에 ‘제법의 유래’를 표시했다. 증류주는 발효주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고 들이는 재료에 비해 얻는 양도 적어 ‘부잣집 잔칫날’에야 한두 모금 얻어 마실 수 있는 귀한 술이었지만, 그만큼 ‘신 내리는 속도’도 빨라서 적게 마신 사람도 금세 ‘신선’으로 만들어주었다.

19세기 말 연속증류로 주정(酒精)을 생산하게 됨으로써 희석식 소주가 출현했지만, 원료는 여전히 쌀이었다. 고구마나 감자에 화학 처리를 하여 알코올을 추출하는 기술은 1920년대 초반 화석 연료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일제도 ‘연료국책’ 방침에 따라 1936년부터 조선에 무수주정(無水酒精) 공장을 만들었다.

1937년 4월 7일, 조선총독부는 차후 무수주정 제조 시설을 갖추지 않은 소주 공장 신설은 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소규모 소주 공장을 대공장에 통폐합하는 조치도 병행했다. 이 뒤로 ‘값싼 알코올’이 대량 생산돼 연료와 음료에 공용되었다. 더불어 술의 ‘신성성’도 옅어졌다.

희석식 소주를 마시나 증류 소주를 마시나 취하면 ‘범인’에서 벗어나는 건 마찬가지다. 취한 사람을 ‘신선’으로 묘사하든 ‘개’로 표현하든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그러나 음주운전 교통사고는 가중처벌하면서 음주 성범죄에는 관대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