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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구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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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천안함 사태의 군 당국 대처에 문제가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그는 사태 초기에 언론과 인터넷에 온갖 의혹이 쏟아지자 급히 군에 해명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본 보고서는 사흘 뒤에야 도착했다. 군 내부의 자체 검열과 복잡한 결재과정의 결과였다. 뒤늦은 보고서로는 광속(光速)으로 번지는 음모론을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 그는 “군 당국의 지나친 기밀주의가 은폐 의혹과 국민의 불신으로 이어졌다”고 아쉬워했다. 우리나라 군사기밀보호법 제7조에는 국방부 장관이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 때는 군사기밀을 공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천안함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결정적인 증거는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다. 최대 변곡점인 선체 인양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군 당국이 한때 천안함 절단면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 혼선을 빚었다. 과잉 기밀주의에서 비롯된 정말 잘못된 발상이다. 절단면은 물론 천안함 격실 내부까지 공개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절단면과 격실 내부가 군사기밀도 아니고 북한에 노출돼선 안 될 정보도 아니다. 이미 함정 내부구조는 국방부 스스로 공개했다. 천안함 철판 두께가 20년간 0.2㎜ 마모돼 11.6㎜란 것까지 알려진 마당에 무엇을 더 숨겨야 하는가.

군 당국은 “온갖 억측을 부를 수 있고 실종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고 걱정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은 정반대다. 어뢰인지, 기뢰인지, 피로파괴인지, 아니면 진짜 우리끼리의 오폭(誤爆)인지를 밝혀줄 절단면은 인양과 동시에 풀 기자단의 취재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적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 실종자 가족의 동의 아래 격실 내부도 공개할 필요가 있다. 꽁꽁 숨길수록 유언비어가 판칠 게 뻔하다. 물론 격실 내부의 실종자 흔적이 큰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군 고위 관계자들이 다치거나 옷을 벗을 수 있다. 그러나 감수해야 한다. 만신창이가 된 해군을 구하려면 다른 우회로가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투명하고 믿을 만한 결론이 나와야 단호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오는 발언이다. 지금까지 이 대통령만큼 제자리를 지킨 경우도 없을 듯싶다. 유사시 대통령의 정위치는 당연히 청와대 지하벙커다. 바다에 불시착할 수도 있다는 경호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백령도를 찾아갔다. 고(故) 한주호 준위의 빈소에 조문한 것도 당연했다.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를 싸잡아 “정치적 쇼”라고 야유했지만, 정말 정치적 쇼를 누가 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른바 ‘VIP메모’도 마찬가지다. 언론에 노출돼 탈이 났지, 메시지 내용은 아무리 뜯어봐도 잘못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나무와 잡초는 큰 바람이 불어야 분간된다. 한 나라의 진면목도 대형 사건이 터져야 드러난다. 아이티 지진에서 약탈이 판치는 아이티의 맨얼굴을 발견했고, 9·11사태를 통해 미국의 참모습을 보았다. 천안함 사태는 인양 이후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국민의 폭넓은 동의가 전제돼야 이 대통령의 ‘단호한 입장’에도 힘이 실린다. 해군사관학교의 교훈은 ‘진리를 구하자-허위를 버리자-희생하자’다. 해군은 이미 큰 희생을 치렀다. 과잉 기밀주의에 갇혀 더 이상 손가락질을 받아선 곤란하다. 진실은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지금 해군에 필요한 건 오직 하나, 진리뿐이다. 진실만이 해군을 구하고 결국 진리가 승리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