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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악용되는 군 사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나폴레옹이 캠프파이어를 돌면서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부상 당할 때를 대비해 최고의 의사와 후송수단을 마련해 두었네. " 병사들이 말했다. "장군님, 전투가 벌어지면 절대로 앞에 나서지 마십시오. "

1941년 윌리엄 셔먼 장군은 부하들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기병대 행렬에 끼여 행군했다. 땡볕이 주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밤에만 행군을 시켰다. 세밀한 배려에 병사들은 그의 요구라면 무조건 수용했다.

6.25 전쟁시, 공포에 떠는 병사들 앞에 김홍일 장군이 나타났다. 인민군 박격포가 작렬하는데도 그는 산등성이를 돌아다녔다.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이 사기를 회복했다. 이처럼 군의 사기는 믿고 따를 만한 수장(首長)으로부터 생긴다.

1993년 전직 국방장관 4명, 4성장군 4명을 포함한 율곡 비리자들이 굴비두름처럼 묶여갔다. 조사를 한다며 1군사령관 부인의 장롱까지 샅샅이 뒤졌고, 육군참모총장과 보안사령관이 하루아침에 해임됐어도 사기를 하소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98년 12월 인천에서 유도탄이 오발됐다. 군 수뇌가 나서서 변명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장군들이 사기를 내세워 엄살을 부렸다. 조사 결과 사고는 장비 탓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전깃줄 합선 때문이었다.

99년 10월, 기름 대신 맹물을 넣고 날던 전투기가 추락했을 때도, 2000년5월 린다 김 관련 율곡사업 의혹이라는 희극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장군들은 사기를 내세웠다.

6월 2일 낮 12시45분부터 6월 3일 오전 9시30분까지 무려 21시간에 걸쳐 이뤄진 청진2호와 우리 해군함과의 교신내용에는 현장 장병의 사기가 비굴하고 참담하게 묘사돼 있다.

"귀하는 우리 영해에 들어왔습니다. "

"6.15 합의사항입네다. 김정일 동지께서 개척하신 통로입네다. "

"귀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귀선은 지금 어느 방향으로 키를 잡으셨습니까?"

"23도 방향입네다. "

"그리로 가셔도 우리 영해입니다. 방향을 더 틀어 주십시오. "

"김정일 동지께서 지켜보고 계십네다. "

"정선하시기 바랍니다. "

"도발하지 말라우. "

"귀국은 50년간 안하다가 갑자기 왜 영해를 침범했습니까?"

"정당한 항로입네다. "

"수색할 수 있게 본국에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

"북한에서는 이미 퇴근했습네다. 우리 선장도 쉬어야 하겠다며 침실로 내려갔습네다. "

이것이 6월 2일자 현장 장병들의 굴욕적인 사기다. 이들의 사기를 올리자는 소리는 없고 난데없이 '장군의 사기' 를 올려달라는 소리만 있다. 보고를 받고도 굴욕을 감내하라며 골프를 즐긴 수장들의 사기인 것이다.

98년 군은 '장군의 사기' 를 올려야 한다며 전방 유류비 40억원을 깎아 장군 승용차를 한단계씩 올렸다. 현지 장병들이 피를 말리며 북한선박에 농락 당하고 있을 때 군 수뇌는 '장군의 사기' 를 위해 골프를 계속했다. 이런 게 장군의 사기다.

'상선'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선으로 보이는 거선' 이었을 뿐 검색도 해보지 않고 어떻게 상선이라 하는가? '심각한 상황' 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단다. 1만4천t급을 포함한 3척의 북한 거선이 줄달아 50년 만에 처음으로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 자체로 직감이 떠올라야 했다.

"공관에서도 지휘할 수 있다" 고 변명하지만 수뇌들의 행동은 '남 보기 좋아야' 한다. 상황지휘는 혼자서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다. 상황실로 나와 참모들과 지혜를 짜내면서 의미와 대책들을 연구했어야 했다. '골프 수뇌' 들의 행동은 누가 봐도 함량미달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또 그 '사기' 가 악용되는 모양이다.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장군이 내 수장" 이라고 생각하면 전방 장병들의 사기는 폭락한다. 일부 병사들은 "이제는 적도 아군도 없다" 며 총을 팽개쳤다 한다. 장군은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사람이지 사기의 수혜자가 아니다. 전방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군 수뇌는 정화돼야 하고 정치에 빼앗긴 '유엔사 교전규칙' 은 현지 지휘관에게 복귀돼야 한다.

池 萬 元 <군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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