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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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3. "니 고만 중 되라"

1972년 새해가 밝았다. 문득 백련암으로 성철스님을 찾아 뵙고픈 마음이 일어났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힘을 낸다고 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큰스님을 뵈면 뭔가 결단을 내릴 수 있으리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1월 2일 대구에서 해인사로 가는 시외버스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신정 다음날 아침이라 승객이 아무도 없었다. 운전기사와 안내양 그리고 나, 셋이서 출발했다. 냉난방 시설이 없었던 시절이라 차안은 매우 추웠다. 몸을 웅크리고 추위에 떨면서 비포장 도로에 덜컹거리는 차체에 흔들리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바로 그 때였다. 나도 모르게 삼매(三昧.마음의 혼란스러움이 사라진 경지)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언뜻 머리 주위를 무지개 빛이 휘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부지불식간에 겪은 '신기한 체험' 에서 깨어나 보니, 버스는 높고 험하기로 유명한 고령의 금산재를 막 넘고 있었다.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그린 그림에서 머리 뒤쪽으로 빛이 나오는 모습, 즉 광배(光背)를 볼 수 있다.

내가 바로 그런 빛의 흐름을 느끼는 체험을 한 것이다. 워낙 신기하고 순간적으로 지나간 일이라 "한번만 더 나타나면 확실히 볼텐데…" 하는 아쉬움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런 신비한 마음을 한쪽 가슴에 묻고 해인사에 도착했다. 친구스님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부탁을 해 허락을 받았다. 속으로 "성철스님을 뵙자마자 따귀를 한방 때려보자" 는 결심을 다지며 방으로 들어섰다. 방문을 열자마자 주먹을 휘두르려고 큰스님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쩌렁쩌렁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뭐냐 이놈아!"

벽력같은 고함에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어리벙벙히 앉아 있었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큰스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놈아, 그게 공부가 아이다. 공부가 아이란 말이다!"

내 속마음을 어떻게 알고 그러는 것일까. 경황 중에 겨우 정신을 차려 그동안의 얘기를 주섬주섬 엮어나갔다. 손톱을 태우던 고통과 결심에도 불구하고 공부에 진전이 없었던 일서부터, 추위에 떨며 금산재를 넘어오다 겪었던 신비체험까지. 큰스님이 계속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다가 한마디 던진다.

"나가 쉬어라. 그건 옳은 공부가 아이다. 헛 경계가 나타난 거지. …여기서 하루 자고 가거라. "

"예" 하고 물러나올 때까지도 약간 멍멍했다. 저녁 무렵 큰스님이 다시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큰스님이 곧장 물어왔다.

"니 중 안될래. 고만 중 돼라. "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펄쩍 뛰는 속마음을 감추지 않는 단호한 대답을 찾았다.

"제가 불교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또 참선이 뭔지를 알고 싶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출가할 생각은 정말 겨자씨 만큼도 없습니다. "

큰스님이 "껄껄" 하고 웃었다. 푸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이놈아, 나이 서른이 돼 세상에서 뭐 할 거고. 부처님 제자가 돼 살아가는 것도 뜻이 있는 거야. 내가 괜히 너보고 중 되라고 하겠나. 나는 함부로 남보고 중 되라고 안 한다. 세상살이가 좋은지, 백련암에서 참선 잘해 도 닦는 것이 좋은지 잘 생각해봐. "

대답을 않고 방에서 물러 나왔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객실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겼다. "지금 당장 내려가 버릴까" 하는 마음. "남에게 함부로 중 되란 말을 않는다던데, 나는 정말 출가할 팔잔가" 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나이 서른에 이제 뭐 할 거고" 라는 대목이 자꾸만 걸렸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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