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 책 여섯 권 받은 ‘신문 배달 소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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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0년대 초 법정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했던 소년인 강모(49·왼쪽)씨가 31일 길상사 행지실에서 덕진 스님(오른쪽)으로부터 법정 스님이 남긴 책 6권을 받고 있다. [박종근 기자]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지난달 11일 입적한 는 법정 스님의 유언 중 하나다. 이 유언을 좇아 31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행지실에서 법정 스님 책 6권이 강모(49)씨에게 전달됐다.

강씨는 1970년대 초 법정 스님이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 있을 때 매일 신문을 전했다. 강씨는 “당시 공양주 보살이던 어머니와 함께 봉은사에 살면서 종무소에 배달된 신문을 법정 스님 처소까지 전달했다. 당시 스님 처소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은 제가 거의 유일했다. 법정 스님은 신도들이 처소를 찾는 일에도 무척 엄격하셨다”고 말했다.

강씨에게 전달된 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생텍쥐페리의 위대한 모색』, 그리고『선학의 황금시대』『선시』『벽암록』 등 6권이다. 강씨는 “이 유품은 제 개인 것이 될 수 없다. 스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공동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은 뒤, 길상사에서 원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강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봉은사에서 법정 스님을 만났다. 당시의 기억도 떠올렸다. “스님께선 눈이 오면 눈을 치우지 못하게 하셨다. 낙엽이 져도 낙엽을 치우지 못하게 하셨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밟는 것을 즐기셨다”라고 전했다. 강씨는 신문을 전달하며 가끔 방 청소도 하고, 스님의 다리도 주물러 드렸다고 한다.

그는 “한번은 스님께서 제게 24색 크레용을 선물로 주셨다. 그때는 주로 10색, 12색이었는데 24색은 아무나 못 갖는 아주 값진 물건이었다. 그러다 3학년 때 어느 날부터 법정 스님이 봉은사에서 보이지 않으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제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으면 한다. 제 행동이 하나라도 잘못되면 행여 법정 스님께 누가 될까 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유언을 맡아 신문배달 소년을 수소문했던 상좌 덕진 스님은 “법정 스님께선 평생 빚에 대해서 무척 예민하셨다. ‘말빚’이라며 책을 절판하라고 하신 것도 그렇고, 신문배달 소년에게 진 빚도 그렇다. 티끌만한 빚에도 참 엄격하셨다. 그 빚을 갚게 돼 마음이 편안하다. 참 좋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한편, 함석헌기념사업회는 법정 스님이 1978년 6월에 쓴 미발표 원고가 발견했다고 31일 밝혔다. 당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이었던 법정 스님이 썼던 미발표 원고 ‘악에 관한 것’을 당시 편집장이던 박선균 목사가 최근 찾아냈다는 것이다.

원고지 14매 분량으로, 신약성서에 관한 언급이 흥미롭다. 스님은 “정말로 나에게 진실과 소극적 저항(passive resistance)의 가치를 깨우쳐 준 것은 신약성서였다. 내가 ‘산상 수훈’에서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와 같은 구절을 읽었을 때 정말로 뛸 뜻이 기뻐했다”라고 적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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