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스스로 힘을 토해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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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당 소장파 국회의원들과 그에 동조하는 중진들의 당정쇄신 요구에 대해 대통령이 "검토해 당정 운영에 참고하겠다" 고 답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에 대통령의 마음을 나타내는 토가 붙었다.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 라는 것이다. 인사 시스템만 바로잡으면 '안동선 파동'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은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대통령은 사적 라인에 있는 몇 사람을 떼어내는 일조차 마음 내키지 않는 것 같은데, 설사 그렇게 하더라도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취임 초에 누렸던 '준비된 대통령' 의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을까.

여당 의원들은 초선.다선이나 이쪽 저쪽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대통령에게 누가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는 말을 염불처럼 외운다. 대통령을 하늘처럼 받들어 임기 말의 권력누수를 막으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권력누수는 혈액 순환과 같다.

권력이 물처럼 흘러야 새 인물이 탄생할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 은 이제 지지자들로부터 받아온 것을 돌려 주어야 할 때다.

*** 大選후보 선출 빨랐으면

DJ를 따르는 이들에게 있어, 그는 하나의 종교와 같다. 이후락은 박정희가 자기의 종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집권자가 들으라고 한 것이지만, 진보 성향의 김대중교 신자들은 집권 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를 따른다.

그가 야당.여당 또는 감옥에 있더라도 지난 수십년간의 정치에는 항상 그가 끼어 있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가 엄청난 고초를 겪어 왔고 지역감정에 의해 많은 불이익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대통령과 노벨상 수상자로 이르게 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으며, 집권 여부와 관계없이 그는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임명하다시피 하는 권력을 누려 왔다.

방송에서 논어 강의를 하던 김용옥이 '문화 권력자' 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강의를 중단한다고 했다. 문화권력을 인정한다면 DJ가 장악해 온 지역감정과 진보주의 권력은 더욱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다. 호남인들과 진보성향인들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아무도 그의 뜻을 거스르면서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

*** 국민에게 돌려주는 권력

한 주간지는 사재 3백억원을 한국과학기술원에 보시한 정문술 전 미래산업 사장을 소개했다. 국민으로부터 받았으니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회사에는 한 명의 가족도 채용하지 않았고, 함께 키워온 회사를 직원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사장직에서 물러났단다.

잡지에 카네기의 말이 인용됐다. "부자가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 '부자' 를 '권력자' 로 바꾸어도 뜻이 통할 것이고, 그 말은 현 상황의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이다.

취임사에서 대통령은 지역감정을 없애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호남인들의 불만이 영남인들의 것으로 돌려졌을 뿐이다. 공약 이행의 묘책이 한 가지 있다. 받은 권력을 특정 지역인에게가 아니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당의 총재와 대선후보를 하나로 만들고, 조기에 선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역감정에 기대 여야에 관계 없이 권력을 누리는 지역 맹주의 후계자는 없어지리라. 물론 차기 후보가 다시 호남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전제로 해서 그렇다. 야당의 후보는 이미 운동화를 신고 뛰고 있다.

국민은 차기 대선에서 여야 후보 당사자끼리의 인물 대결을 보고 싶어 한다. 물러나는 대통령이 자기 당의 후보를 보자기에 싸서 가슴에 품고 야당 후보와 겨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여당 쇄신운동의 과정에서 모든 당원들이 얼마나 대통령에게 의지하고 있는가를 잘 보았을 것이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대통령과의 면담" 으로 무마하거나 협박하려고 한다. 대통령 측근이 과거 당의 대변인을 향해 "독한 거짓말" 을 한다고 쏘아 붙일 지경이다. 당 전체가 거짓말쟁이가 돼버린다.

쇄신의 근본은 스스로 힘을 풀어버리는 데 있다. 일찌감치 대선 후보를 선출하고 그에게 일체의 실질적 당권을 주어버리면 정권 재창출 충성서약자를 장관으로 만들 이유가 자동적으로 없어진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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