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칼럼] 쇄신 운동은 구원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여권 쇄신' 을 둘러싼 정부와 민주당 내의 진통이 한 주일 이상 지속됐다. 초.재선의 소장파 의원들이 들고 나온 여권 쇄신 주장은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안동수 전 법무장관 추천자 문책, 잘못된 인사.국정 시스템 개선, '비선 라인' 차단,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지도부 교체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무도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거론하고는 있지 않지만 이런 쇄신 주장들은 모두 金대통령의 국정 운영 행태 및 스타일과 직결돼 있다. 그런 점에서 집권당에선 매우 이례적인 심각한 문제 제기였다.

***떠나던 민심 눈길 끌어

정부.여당 내에선 지난해에도 국정쇄신 대책을 세우겠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온 것은 '강한 여당 강한 정부' 론이었다. 많은 국민이 기대했던 여야 상생.협력의 정치가 아니라 대 야당, 대 비판세력 강공책으로 나타났다.

안기부 돈의 신한국당 15대 총선자금 유출 수사, 언론사 일제 세무.공정위 조사, 민주 - 자민련 - 민국당의 연합을 통한 다수파 공작 등으로 이어졌다. 어렵고 귀찮더라도 국민의 선택을 존중해 야당과 호양(互讓).협력의 정치를 하려 하기보다 정권재창출과 턱없는 강공에 매달렸다. 자연히 믿을 사람만 찾게 되다 보니 무리한 인사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민심이반으로 꼬여만 가는 지금의 집권당 형편을 보면 초.재선 의원들의 쇄신 요구는 그야말로 구원타(打)라고도 볼 수 있다. 떠나던 민심이 다시 민주당을 쳐다보기라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金대통령과 집권측은 이런 여권 쇄신 요구를 적극 수렴해 여권의 태세를 일신하고 민심을 추스르는 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집권당 관리와 국정운영 방법도 대통령 임기 초와 임기 말은 같을 수가 없다. 강한 리더십이 발휘되는 임기 초에는 약간 무리할 정도로 밀고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임기 말에는 무리해선 안되고 무리가 통할 수도 없다. 임기 말이 가까울수록 누수.레임덕현상이 일어나는 건 일종의 자연현상이다. 아무리 명분이 서고 목적이 순수하다 하더라도 이번처럼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에 대해 여당 내에서 공개성명으로 반발하는 사태는 레임덕이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이기도 하다.

원래 집권자가 집권세력을 다스리는 무기로는 공천권, 당직 및 공직 인사권, 정치자금 지원, 징계권, 국가기관을 통한 사정과 강권 등이 활용돼 왔다. 유신체제가 시작되기 전에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도 3선개헌 과정과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을 둘러싸고 집권 공화당 안에서 조직적인 반발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의원 3분의2 이상의 지지가 필요했던 3선개헌 때는 소속의원들에 대해 당근과 채찍, 압력과 회유책을 고루 구사했다. 개헌반대 핵심세력은 출당, 정보부 연행.감시.도청 등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대통령이 직접 의원들을 불러 설득.회유하는 노력을 병행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 주변의 막강한 권력자였던 비서실장과 정보부장을 의원들의 퇴진 요구를 수용해 후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3선 후 유신체제를 심중에 두었던 1971년 10월 2일 내무장관 해임안 가결파동 때는 강경진압으로 바뀌었다. 여당 일부의 조직적 반발로 해임안이 통과되자 그 날로 대다수의 여당의원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해 당론에 반해 투표한 사람을 가려내고 그 중 주모자 2명은 탈당시켜 의원직을 빼앗고, 수명을 징계조치했다.

***대야 관계도 쇄신해야

그 과정에서 항명 주동자를 포함해 상당수 여당의원들이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해임안에 찬성했던 의원 대부분은 다음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다.

지금은 그 때와는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시절에 그 때처럼 회유자금이 오가기도 쉽지 않고, 여론에 긍정적 반응을 얻는 당내 반발에는 징계권을 발동하기도 어렵다. 여당의원 다스리는 데 국정원을 활용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고, 사정권 발동에도 한계가 있다.

더구나 金대통령의 경우 국회의원 공천권 행사도 이미 끝난 처지인 데다 당직에 연연하지 않는 소장의원들에게 인사권이 먹혀들 소지도 작다.

그렇다면 이제 당내 반발과 불만을 추스르는 방법은 도덕적 권위로 설득하고 합리적 쇄신 요구를 수렴해 나가는 길밖에는 없다.

金대통령도 다행히 이들의 쇄신 운동을 민주적 과정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집권측은 이번 일을 여권 쇄신뿐 아니라 대야 관계를 포함해 정치행태 전반을 쇄신하는 발상전환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그러면 지금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성병욱 본사고문 · 고려대 초빙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