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무지개 증후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스타냐, 엘리트냐. 우리 젊은이 눈엔 오직 이 두길 밖에 보이지 않는다. 스포츠.연예계의 스타가 되든지, 아니면 서울대를 거쳐 엘리트가 되든지.

그 이외 어떤 길도 눈에 드는 게 없다. 그 집착은 가위 병적이다. 이 다양한 사회, 수많은 갈 길 중에 왜 그 길밖에 보이지 않는지. 다른 건 아예 거들떠 볼 가치조차 없는 중증의 시야 협착증에 걸려 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과외열풍, 아니면 학교도 포기한 채 스타의 꿈을 향해 광적인 돌진이다. 부모도, 사회도 모두 들떴다. 매스컴의 요란한 팡파르에 현혹돼 모두가 집단최면에 걸린 것도 같다. 이제 이런 열풍은 우리 시대의 심각한 사회병으로 만연된 느낌이다.

될 수만 있다면 누가 말려. 인기.돈, 화려하다. 이게 싫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문제는 그럴 수 있는 확률이다. 이건 기적 이상의 기적이다. 우선 열병을 식히고 냉철한 눈으로 자기를 보자.

엘리트?

좋다. 하지만 공부 재주부터 확실히 타고 나야 한다. 1%의 천재와 99%의 노력이 천재라지만 우선 그 1%부터 갖춰야 한다. 이것 없이는 아무리 노력해야 도로아미타불이다. 타고난 공부 재주만으로도 물론 안된다. 하려는 의욕, 참고 노력하는 끈기, 그리고 건강이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걸 다 갖추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천재다. 설령 3수, 4수까지 힘들여 그 관문을 뚫었더라도 대학을 무사히 마친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게 바둥거려서야 몇 해를 견딜 건가.

해서 명문대일수록 노이로제 환자가 많다. 간판에 현혹돼 마음에도 없는 전공을 하다 보면 그 갈등은 평생을 괴롭힌다. 그 간판으로 취업도 쉽지 않거니와 된들 조직에 적응력이 없어 퇴출이다.

진짜 천재는 그렇게 바둥거리지 않는다. 평소엔 놀 것 다 놀고 슬슬 하다가 결정적 시기가 오면 바짝 죈다. 그래도 거뜬히 합격이다. 그럴 여유가 있어야 폭 넓은 교우, 교양도 쌓고 인간수업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게 진짜 천재다.

연예계도 다르지 않다. 재능도, 끼도, 천부적으로 타고나야 한다. 사람을 매료하는 마력, 눈물겨운 노력, 그리고 운까지 겹쳐야 한다. 어느 하나가 부족해도 별 따긴 글렀다. 노력만큼의 보수가 돌아가지 않는 게 연예계의 생리다.

주변에서 서성이다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가야 한다. 어쩌다 잠시 반짝 빛날 수도 있다. 이것도 대단한 행운이다. 하지만 정말 잠시다. 유성처럼 흘러 까맣게 사라진다. 연출.감독.제작진 눈에 들게 비위도 맞춰야 한다. 자존심.비굴도 삼키고 온갖 음모와 음해도 견뎌내야 한다. 이건 가위 죽음의 행진이다.

스포츠계도 물론 다르지 않다. 천부적 소질과 피나는 노력-이건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다. 난 장훈 선수와 악수한 적이 있다 그의 손바닥이 장작개비 그대로다. 이게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이다. 어디 이것만이랴. 운도 따라야 한다.

운 좋게 주전자리를 차지해도 슬럼프.부상, 벤치를 지켜야 하는 아픔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긴 실력 없으면 가차 없이 쫓겨나야 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잘 견뎌도 길어야 10년, 프로의 활동기는 정말 잠깐인데 후보 명단에도 못 끼어 마냥 기다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화려한 무대, 스포트라이트, 열광적 환호 등 무지개를 좇는 건 좋다. 젊은 날, 그런 꿈도 없다면 그게 어찌 젊음이랴. 문제는 기적 같은 확률이다. 언젠가 꿈을 접고 서성이던 무대를 떠나야 하는 날, 그 참담한 심경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실의.절망.좌절.의욕상실.우울.자살까지 완전 녹초다. 무거운 짐을 메고 달려온 고갯길. 이윽고 탈진, 완전 연소 증후군이다. 더 탈 게 없다. 한발짝 옮겨 놓을 힘도, 의욕도 없다.

그래도 인간은 모진 것, 얼마간의 절망적 방황이 끝나면 다시 꿈틀거린다. 하지만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10대, 20대.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결정적 시기에 무지개만 좇아 다녔으니 배운 게 있나, 익힌 기술이 있나. 눈만 잔뜩 높아 손에 잡히는 일이 없다. 참으로 막막하다. 이제 꿈은 깼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다.

이처럼 우리 주변엔 이무기도 못 돼 좌절의 늪에 빠진 젊은이가 너무 많다. 어릴 적부터 세상을 바로 보는 눈,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천재 망상, 재능 망상증의 감별도 할 수 있는 냉철한 눈을 길러야 한다.

무지개의 뒤안길에 기다리고 있는 눈물과 좌절의 깊은 수렁을 볼 줄 아는 혜안도 길러야 한다. 세상엔 참으로 길이 많다. 이걸 두루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시형 박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