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제주도민에게 물어보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몇년 전에 제주도에 갔다가 관광안내원의 말에서 풍기는 외지인에 대한 적대감의 강도에 크게 놀란 일이 있다. 심지어는 "며칠 전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다행히 육지인들만 죽었다" 는 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제주도 관광객의 대부분이 본토에서 간 사람들이었으니 관광안내원들은 육지인들 덕분에 먹고 산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철 없는 아가씨로구나 했다가 제주민란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졌던 일이 있다.

***준비 안된 영어 공용어화

얼마 전 제주도를 국제적인 자유도시로 만들기 위해 영어를 제주도의 공용어로 한다는 안을 보고 즉각 걱정된 것이 제주도민의 반발이었다. 제주도가 무슨 새로 개척하는 식민지도 아니고, 본토인들의 아니꼬운 행태를 많이 참아야 하는 제주도민에게는 본토 표준어를 배워야 하는 것도 불만스러울 수 있을텐데 외지인 마음대로 공용어를 추가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몇해 전 영어공용어화 논란이 일었을 때 나는 어차피 우리세대에서는 실현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다음 세대가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막을 수 없을 터이니 논란은 무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다음 세대의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고, 다음 세대가 요즈음의 프랑스나 독일국민 만큼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면 구태여 영어를 공용화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당장 내년부터 제주도에서 영어를 공용화한다는 정부.여당의 안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런 안은 해당지역민이 자발적으로 제안하는 것이 순리이고, 정부나 여당이 생각해 냈다면 논의를 진행시키기 전에 제주도민과 심도있게 논의를 하며 설득작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제주도민 자신들이 현재와 같은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제주도를 찾고 이용하는 외국의 관광객이나 투자자들로 만족한다면 중앙정부는 그들에게 지원과 인센티브를 줘서 현 상황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공용어 추가를 원전건설이나 화장장 설치 같은 식의 전국과 지역간의 문제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한다면 영어를 어떤 정도로 병용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공문서에만 영어를 병기한다 해도 몇달의 준비로는 어림도 없다. 대다수 제주도민이 전적으로 찬성을 하고 비상한 각오를 갖고 적어도 5~6년간 전심전력으로 영어를 수련한 후 한두 지역에서 실험적으로 실시를 한 후에 전 도로 확대한다면 어느 정도 성공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 없이 졸속으로 시행해서 제주도의 어린이들이 매일같이 틀린 영어를 접하면서 성장하게 된다면 그들은 일생 바른 영어를 구사하기가 지극히 어렵게 될 것이다.

외국어문학을 전공하면서 '바벨탑의 저주' 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실감한다. 지극히 간단한 문장도 그대로 옮겨서는 틀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어린이가 "저는 커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면 대견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맹랑하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언어감각에 결함이 있는 아이로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외국인들까지 혼란 불러

그러나 미국에서 어떤 아이가 "I will be (또는 become) a president when I grow up" 이라고 말한다면 정신상담과 언어교정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평가들의 비난을 받고 '흥분했다' 는 것을 "He was excited by the censure of his critics" 라고 옮긴다면 대부분의 미국인은 비난을 받고 왜 신이 났을까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말에서 '왜 이렇게 깜깜해?' 나 '이게 얼마만이야?' 는 답답함이나 짜증, 또는 반가움을 표현하는 일종의 감탄문인데, 영어로 'Why is it so dark?' 나 'How long has it been since we met?' 는 어두운 이유나 지난번 해후 이래 흐른 시간이 얼마인지를 묻는 의문문이다.

얼마 전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이 '주체성 있게' 개정돼 많은 한국학 관련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적절한 준비 없이 영어가 공용어화 된다면 얼마나 많은 '주체성 있는' 영어가 우리 공문서에 등장해 나라 체면을 망치고 외국인에게 혼란과 차질을 빚게 될 것인가? 생각하기도 두렵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 · 영문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