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24>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내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우리 동네로 들어서던 느낌은 나중에 두 번째의 서울 철수가 있고나서 돌아오던 날의 느낌과 겹쳐져 있다. 그맘때에는 일기를 쓰고 있던 무렵이어서 어머니의 권유대로 내가 '집에 돌아오던 날'이라는 작문을 써서 전국 초등생 백일장에서 칭찬을 받았던 때문일 것이다.

깨어진 유리창과 그 조각들, 누군가 들어와서 휘저어 놓은 듯한 안방과 건넌방의 잡동사니들과 발자국들, 찢어진 채 늘어져 있는 천장 벽지, 비가 들이쳐서 흠뻑 젖어있는 방바닥, 함부로 들어와 기어다니고 있는 집게벌레나 설서리 따위들, 그리고 귀퉁이마다 번성해 있는 거미줄들, 언젠가 몰래 그려놓은 내 엉터리 그림과 낙서마저도 주인을 잃어 가엾어 보인다.

비가 오는 날 이른 아침에 방문을 열었더니 아버지가 한길로 향한 유리문 앞에 서서 조용히 내다보고 있었다. 거기는 나중에 마루를 깔아서 실내가 되었지만 그때에는 지붕 아래만 같은 공간이고 맨땅이었다. 자전거포를 하던 장소라 땅은 검은 색이고 손으로 더듬으면 녹슨 못이나 하여튼 쇠붙이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그런 빈 공간이었다. 그때에는 아버지가 제화공 아저씨를 두고 가게에 내갈 구두를 짓던 곳이었고 구두나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구두 모형들을 쌓아놓는 곳이기도 했다. 그 앞에 격자 틀에 유리를 넣은 창문이 연이어 달려 있어서 우리는 비가 와서 한길에 큰물이 지거나 건너편 동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곤 했다. 나는 아버지의 옆에 가서 섰다.

군인들이 행군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자기 키와 비슷한 긴 장총을 메거나 구멍이 뚫린 따발총을 메고 장교들은 당꼬바지에다 누런 가죽장화를 신고 권총을 찼다. 단발머리의 여군도 보였고 키가 작고 어려서 꼭 우리 동네 형만한 군인도 보였다. 인민군들은 한참이나 우리 집 앞 한길을 지나갔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역전까지 진출을 해서 더 많은 군인들과 탱크를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도 있었다. 탱크병들은 아이들을 불러서 하나씩 내부를 구경시켜 주기도 했고 건빵도 나누어 주었다. 새로 통반장이 정해졌는데 통장은 방앗간 집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뚱뚱하고 사람 좋게 생긴 웃음을 늘 달고 다녀서 사람들이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찾아와 동네 반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꼭 한 달만… 하면서 겨우 그 직임을 맡았지만 그야말로 한 달 만에 그만 둘 수가 있었다. 때마침 어머니는 아우를 배고 있어서 차츰 배가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임신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는 그만큼 피란길에서 안전했다. 날마다 미군의 공습이 치열해졌고 영등포는 주위가 거의 산업시설이어서 차례로 폭격을 맞기 시작했다. 폭격이 시작되면 바로 곁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방의 구석진 곳에 앉히고 두꺼운 겨울 솜이불을 들씌워 놓았고 어머니는 그에 더하여 '싱거 미싱' 재봉틀 아래 나를 밀어넣곤 했다.

그림=민정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