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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 동상이몽 속에 개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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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946년 봄 하지 미군 사령관(왼쪽)과 슈티코프 소련군 사령관(오른쪽)이 미·소공동위원회 운영에 대해 밀담을 나누고 있다.

1946년 3월 20일 덕수궁에서 미·소(美蘇)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미·소공동위원회는 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협정의 제2항에 따라 한반도 남과 북의 점령군 사령관이 만난 자리다. 한반도에 대한 향후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모스크바 3상 협정의 제2항은 ‘조선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 조성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미군과 소련군의 대표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지만 처음부터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미군 대표는 ‘적절한 방안’에 방점을 두었지만, 소련군은 ‘조선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에 무게를 두었다. 따라서 46년 1월 16일에 열린 예비회담에서 미군은 남북 간의 경제교류 방안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소련군은 공동위원회에 조선 측 대표를 참석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결국 양 측은 3상 협정의 2항에 있는 내용 그대로 ‘조선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에 초점을 두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시작했다. ‘조선임시정부’라는 기구와의 협의를 통해 신탁통치 문제를 비롯한 제반 문제를 의논해야 한다는 것이 협정 제3항의 골자였기 때문이다. 남과 북에서 점령군의 지원 하에 46년 2월 민주의원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꾸려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위원회는 원활하게 운영될 수 없었다. 특히 미군은 딜레마에 빠졌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민주의원의 주도세력들이 대부분 반탁운동을 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3상 협정을 반대하는 세력을 위원회에 참여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미군은 언론의 자유를 내세워 모든 정치세력의 참여를 주장했다. 결국 2개월간의 논의가 무위로 돌아간 후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이듬해 5월 21일 제2차 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결국 미군과 소련군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결렬됐다. 이후 남과 북에서 분단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왜 실패했나? 1946년부터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트루먼 독트린 등이 이어지면서 냉전이 심화돼 미국과 소련의 합의 자체가 어려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만약 한반도 내 정치세력들이 이념을 떠나 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역사에서 ‘만약’을 상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분할 점령 후 1955년 통합정부를 수립한 오스트리아의 예를 볼 때 미·소공동위원회의 진행과 결렬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