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읽기] '푸른안개'를 보며 사랑을 되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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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이혼한 후배를 떠올리며 '사랑한다면 결혼하지 말라' 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들은 불같이 뜨거워진 채 결혼했고 또 얼음처럼 차가워진 채로 헤어졌다.

정녕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저 사람과 입을 맞출 때 행복하다면 그건 사랑일 거라고 간주한 때는 스무 살 무렵이었다. 이것이 정말 사랑이라고 확신하는 데 드는 시간은 얼마쯤이 적당한지,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그것은 다른지, 눈빛의 강도와 심장박동수는 또 얼마나 바뀌는지도 알고 싶다.

주말연속극 '푸른 안개' (KBS2)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여대생들 사이에서도 그 이야기가 관심거리인 모양이다.

극중에서 아내는 묻는다. 그 아이를 사랑하느냐고. 대답을 망설이는 남편에게 다시 묻는다. 그 아이와 잤느냐고. 사랑하는 것과 잠자는 일의 상관계수는 얼마나 되는 걸까. 정말 사랑해서 함께 자고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는 비율을 조사한 보고서는 없는지도 궁금하다.

이야기의 거죽만 보면 내가 미성년자일 때 규정을 어기고 본 '미워도 다시 한번' 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결혼과 출세에 도달한 40대다 (물론 통속의 잣대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는 배경이 없다는 이유로 장모에게 꾸준히 무시당하며 산다. 결혼에 배경은 필요하지만 사랑에는 필요치도 충분치도 않다. 교양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내조차 도발적인 20대에게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음으로써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 '얼마' 란 물론 돈의 양이다.

나쁜 드라마는 별다른 고뇌 없이 '찍어내는' 드라마다. 무성의하기 때문에 나쁘고 시청자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에 나쁘다. '푸른 안개' 는 우리 시대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는 점에서 괜찮은 드라마다.

'옛날에 금잔디' 등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천착해 온 작가 이금림씨,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등으로 사랑의 경위를 격조 있는 영상으로 보여준 연출가 표민수씨의 안목과 솜씨가 돋보인다.

불륜을 보여준다고 시청자들이 불륜에 불감증세를 보일 거라고 근심하는 건 명석한 판단이 아니다. '푸른 안개' 는 나 혹은 나의 가족이나 이웃에게 저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게 더 아름답고 덜 상처받을지 가늠하게 해 주는 드라마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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