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 본래 한 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조계종 혜암 종정의 석탄일 법어에 "마군(魔群)과 제불(諸佛)은 본래 한몸이다" 라는 절규가 들어 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과 같다. '마군' 과 '제불' 을 구별할 수 없게 된 일체지(一切智)의 경지까지 수행의 결과를 이룬 사람이 부처일 테니까 말이다.

*** 대우차 노조 왜 투쟁하나

보통사람은 어리석은 분별지(分別智)에 머물면서 안간힘만 쓰다가 금생(今生)을 끝내고 만다. 부처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보통사람의 어리석음이다. 깨달음은 누가 대신할 수도 없고 보시(布施)할 수도 없다. 그런데 석탄일과 노동절이 올해는 한날이다.

올 봄은 한국경제의 날씨가 무척 가물다. 실업률이 다시 본격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우차 노동자들이 경찰과의 충돌에서 전경들에게 심하게 맞은 것이 이 메마른 계절에 불을 질렀다. 경찰쪽에서는 매를 먼저 맞은 것도, 정신적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도 노조가 아닌 경찰이라고 주장한다.

노조의 투쟁 대상은 사용자인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대우자동차에는 지금 투쟁의 대상으로 지목할 만한 사용자가 없다. 주인은 없지만 채권자는 있다. 채권자인 은행의 주인은 정부다. 그래서 이 불은 방향을 공권력으로 잡고 본격적으로 타들어가고 있다.

노조는 석탄일을 경축 대신에 투쟁의 날로 선택했다. 정치지도자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굽신거리지만 노조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노조의 투쟁이 석탄일 경축에 불경(不敬)을 끼치더라도 불교쪽이 화가 나서, 마군의 눈에는 마군만 보인다는 법어를 발표하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경찰 관련 전문가들은 전경들을 성격상 과격 노조원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전경은 노조원보다 더 열악한 근무조건에 놓여 있다. 전경쪽에서 보면 노조는 자기네를 괴롭히는 적이고 투쟁의 대상이다. 이번 사건은 노조측이 싸움을 방화(放火)하기 위해 전경이라는 휘발유에 불을 던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경찰 간부 가운데는 노조의 이번 메이데이 작전의 최종 공격목표가 경찰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경찰의 보수성과 공권력 수호 전통은 그 음정이 매우 높은 자리에 있다. 경찰이야말로 공권력의 상징이요, 실체라는 확신 속에서 그들은 산다.

그러나 노조의 목표는 경찰에 있지 않다. 이무영 경찰청장의 경질 요구는 노조의 이번 메이데이 투쟁작전에서 통과적인 중간목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그를 선뜻 경질하지 않는 것도 이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경질해 봤자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다). 노조의 강성지도자들이 파괴하려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개혁' 이다.

노동시장에 유연성을 들여놓으려는 노동개혁은 말할 것도 없고, 한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던 기업개혁도 이제는 기어이 저지하려 하고 있다. 대우자동차의 경우 기업개혁은 다름 아니라 회사를 새 주인에게 파는 것이다. 이런 기업개혁은 노동개혁, 즉 노동의 유연화를 선결조건으로 삼기 때문이다.

일체가 공(空)이라는 깨달음 속에서만 부처와 마귀가 한몸인 것이 보인다고 한다. 이런 깨달음은 오직 부처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고난도의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인정하면 기업과 노동이 비록 한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공생관계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보인다. 석탄일과 노동절이 한날 속에 공존하듯이 말이다.

*** 저지 대상이 된 노동개혁

노조 안에서도 현실적인 생각을 가진 조합원들은 기업이 망하면 근로자도 직장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업개혁과 노동개혁은 본래 한몸이다. 그리고 개혁과 시장도 본래 한몸이다. 반(反)시장적인 것을 시장적으로 만들자는 것이 개혁이다.

노동의 유연성 없이는 기업개혁이 불가능하고 기업개혁 없이는 기업이 살 수 없고 기업이 살지 못하면 노동자의 일자리도 없어진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노동개혁을 막으려는 강성 노조지도자들의 완강한 반시장적 분별지를 앞으로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까.

노동개혁이 없었으므로 김대중(金大中) 개혁은 실은 아직 첫 발짝도 떼지 못했다는 해묵은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이든 야당 당수든 지금은 노조를 위해서도, 경찰을 위해서도 울 때가 아니라 개혁을 위해 울어야 할 때다.

姜偉錫(월간 emerge새천년 편집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