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페르손 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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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70년대 후반에 발표된 조세희의 '난쟁이' 연작소설은 지금은 고전 취급을 받고 있다. 철거민촌에 사는 난쟁이와 그의 부인, 세 자녀를 둘러싼 이야기가 중심이다. 연작 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에서 난쟁이의 큰아들은 공책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폭력이다.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는 나라는 재난의 나라다. 누가 감히 폭력에 의해 질서를 세우려는가. 17세기 스웨덴의 총리였던 악셀 옥센셰르나는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세계가 얼마나 지혜롭지 않게 통치되고 있는지 아느냐. " 사태는 옥센셰르나의 시대 이래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글에 등장하는 악셀 옥센셰르나는 17세기 북유럽의 난세(亂世)를 헤쳐나간 인물로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유능한 총리로 불린다. '북방의 사자' 라는 별명답게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던 국왕 구스타프 2세를 도와 내치(內治)에 힘씀으로써 근대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의회제도와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중상주의(重商主義)를 도입했으며, 학교법을 제정해 교육에도 관심을 쏟았다.

구스타프 2세가 전사(1632년)한 뒤에는 30년 전쟁을 자국에 유리하게 매듭지었다. 그런 옥센셰르나도 자기 아들에게 '지혜롭지 못한 통치' 를 한탄했고, 작가 조세희는 그 말을 빌려 유신독재 시절 한국의 암담한 정치현실을 은유하고자 했다.

스웨덴은 나폴레옹전쟁(1797~1815년) 이후 1백80년 이상 전란을 겪지 않은 나라다. 엄격한 중립정책으로 1, 2차 세계대전의 참화도 피했다.

그러나 스웨덴의 중립은 스위스.오스트리아와 달리 헌법이나 조약으로 못박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2차대전 중 스웨덴은 독일군의 자국영토 통과를 허용했고, 반대로 자국 구축함을 영국에 제공하기도 했다.

예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다음달 초 남북한을 차례로 방문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문제 등 남북관계에 무언가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어 미국 부시정부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지혜롭지 못하게 통치되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페르손이 표류 중인 남북관계에 청량한 '지혜' 를 던져주길 기대한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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