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불평등 즉 평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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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희대 조정원(趙正源)총장 집무실엔 '불평등 즉 평등' 이란 액자가 걸려 있다. 평등주의가 대세인 사회풍조에서 불평등주의를 강조하기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외치는 것만큼 부담스럽다. 그런데도 불평등을 버젓이 앞세운 그의 강심장이 돋보인다.

*** 평등주의가 넘친다

우리 사회의 각종 평등주의 중에서 가장 위선적인 것이 교육 평준화정책이라고 본다. 평준화는 학생 개개인의 불평등을 처음부터 무시한다. 학교간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학생을 공정하게 뽑아 평균적으로 가르치겠다는 평등정책이다.

나름대로의 성과도 있었겠지만 정책이 20년을 넘기면서 교육의 하향평준화가 현실의 문제로 심각하게 나타났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사교육의 융성으로 나타난 지 이미 오래다. 교육 평준화란 군사독재 시절 관치교육의 전형이다.

신체조건만 대충 맞으면 똑같은 제복에 똑같은 교육방식으로 똑같은 계급을 붙여 똑같은 밥을 먹이고 똑같이 잠자고 일어나는, 이름도 개성도 존재하지 않는 병영생활을 교육현장으로 옮긴 게 아닌가. 이런 평등주의 교육은 산업화시기엔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겠지만 다양한 개성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정보화시대엔 극복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 정부 들어 교육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아무리 강조하고 교육개혁 사업을 펼쳐도 이게 잘 풀리지 않고 꼬여만 간다. 그 이유는 평등주의 몸통에 개별성과 차별성을 중시하는 불평등주의를 접목시키려니 제대로 될 리 없는 것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불평등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본다. 신체적 조건, 두뇌의 조건, 그가 살아온 다양한 삶의 세계와 다양한 감정 체제의 불평등을 용인하면서 그 불평등 조건에 맞는 맞춤교육이 올바른 이 시대의 교육방향이 돼야 할 것이다.

지금 사립학교법을 새로 뜯어고친다고 여당이 소란을 떨고 있다. 이 또한 관치교육의 연장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발상이다. 재단비리나 분규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할 경우 관선체제를 통한 별도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

그런데도 몇몇 학교의 재단비리를 문제삼아 모든 학교의 경영자들을 범죄인시하고 학교운영을 학교장에게 맡기겠다는 군사독재시절의 평등 유니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사는 기술과 능력을 배운 곳이 그 말썽많던 '우골탑' 시절의 사립대학이었음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그 대학들이 성장해 오늘날의 명문대학으로 성장한 것이다. 지난 과거를 들먹여 모든 대학을 범죄시할 것인가. 범죄행위는 범죄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지 선의의 교육경영자를 범죄자로 몰고 모든 사립학교를 법으로 통치하겠다는 발상은 평등주의의 또다른 만용이다.

돈은 적게 내지만 치료는 똑같이 받자. 신문은 적게 팔리지만 많이 파는 신문과 똑같이 팔도록 제도화하자. 우리 신문사엔 사주가 없으니 너희도 사주의 소유를 제한하라. 그것을 법으로 만들자. 이런 평등주의가 의료개혁.언론개혁이란 이름으로 성화를 부려대니 사회 전체가 흔들리고, 지금 내가 어느 사회에 살고 있나 하는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지난주 뉴욕타임스지에 MIT대의 경제학 교수인 폴 크루그먼이 '감정적 반(反)세계화 왜 잘못인가' 라는 글을 실었다. "서른살 전에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은 심장(감정)이 없다. 그러나 서른살이 넘어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머리(이성)가 없다" 는 유럽 속담을 그는 인용하면서 지난 주말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반세계화 군중집회를 비판했다.

*** 불평등 다양성 생각할 때

세계화가 항상 아름다운 게 아니다. 미성년자들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낸 방글라데시의 스웨터를 보면서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 스웨터를 월마트가 수입해 파는 것을 법으로 중단시킨 하킨스 상원의원 같은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그는 매도했다.

그런 법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아이들은 더욱 나쁜 조건의 직업을 구해야 했다. 수출이 나쁜 게 아니라 근로조건 개선이 중요하다. 국제무역에 대한 격분만이 세계 빈곤문제를 푸는 해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머리가 없거나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가지를 쳐야 할 일을 몸통부터 잘라내는 평등주의 만용을 비판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 보자. 머리는 없고 심장만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설치지 않는가. 이성보다 감정으로 매사를 재단하고 몰아붙이는 평등 포퓰리즘의 세상이 되고 있지 않은가. 평등의 감정을 앞세우기 전에 불평등의 다양성을 생각하는 이성이 시급한 시점이다.

권영빈 <중앙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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