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왜 그들은 14년 임기를 보장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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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 보름간 한국은행 총재 선임은 진통을 거듭했다. “뷰티 콘테스트가 아니라 리스트 어글리(least-ugly) 콘테스트다.” 지난 주말부터 좋은 인물을 고르기보다 덜 나쁜 사람을 뽑는 쪽으로 인선기류가 돌변했다. 어윤대·강만수 카드는 “곤란하다”고 정리됐다. 대통령 측근이란 게 악재였다. 야당의 반발이나 G20 의장국으로서 “통화정책까지 넘보느냐”는 국제적 체면도 변수가 됐다. 청와대는 결국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한 선택을 했다. 김중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는 가장 무난한 카드였다.

요지경의 인선과정에서 조직 이기주의는 맨살을 드러냈다. 한은 쪽은 대놓고 “차라리 힘센 총재를 원한다”고 말했다. 한은법 개정을 앞두고 금융 검사권을 확보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중앙은행의 독립’보다 ‘한은 직원들의 독립’에 목을 매는 모습이었다. 기획재정부는 너무 센 한은 총재는 함께 일하기 불편하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강만수 카드가 물 건너가자 김 대사를 은근히 밀었다. 이런 세력 다툼과 ‘깜깜이 인선’은 곧 다가올 금융통화위원 교체에도 반복될 조짐이다. ‘금통위원을 노리는 대선 캠프 출신이나 대학교수들이 100m 이상 줄 서 있다’는 소문이 빈말은 아니다.

미국의 FRB 이사 선임은 우리와 딴판이다. 상원 청문회를 거쳐 임명되면 억대 연봉에다 14년의 임기가 보장되는 명예로운 자리다. 하지만 임기를 채우는 경우는 없다. 지금도 7명 중 두 자리가 공석이다. 보통 3~4년간 소신껏 일한 뒤 미련 없이 떠나는 게 관례다. 워낙 능력이 출중해 딴 곳으로 옮기면 훨씬 많은 연봉과 편한 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명망가는 아니다. 월가 출신의 케빈 워시는 35세의 새파란 나이에 이사로 발탁됐다. 한국은행의 과장급 나이다. 올해 연세대가 초빙하는 랜달 크로즈너 시카고대 교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43세의 ‘젊은 피’로 FRB 이사에 올랐다가 3년 만에 털고 나왔다.

검증과 분석이 생략되면 정작 국민들은 누가 누군지 모른다. 깜깜이 인선으론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오해와 편견을 부른다. 김 내정자도 마찬가지다. 그와 오래 일한 한국개발연구원(KDI) 사람들은 “경제수석 때 존재감이 없었다”는 평가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는 정치적 지분 없이 유일하게 청와대에 입성했다. 조심스레 처신하다 갑자기 광우병 파동 쓰나미로 물러났다.” 오히려 김 내정자는 소신과 조직장악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OECD 대표부를 ‘사관학교’로 확 바꾸어 놓았다. “너무 일을 시켜 힘들다”며 귀국한 외교관이 생겨났을 정도다.

얼마 전 청와대는 민간 금융전문가들을 초청해 회의를 열었다. 한 외국계 인사가 “기준금리 동결이 정말 옳은지 신중히 되짚어봐야 한다”고 하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만큼 청와대와 정부는 금리인상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통화정책의 독립성은 보장돼야 한다. 잘못된 금리정책은 한참의 시차를 두고 반드시 엄청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한은 총재와 금통위원의 깜깜이 인선이 언제쯤 정상적인 뷰티 콘테스트로 바뀔까. 미국처럼 “나 이제 그만두겠다”고 청와대에 멋진 이별 편지를 쓰는 장면은 볼 수 없을까. 한은 총재의 인사청문회 도입과 금통위원의 임기 연장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중앙은행을 하찮게 여기는 나라치고 선진국이 된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