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풍속도] 골라받고 '끼리끼리' 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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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휴 대폰 회원카드. 요즘 신세대들 사이에선 '없으면 간첩' 으로 통할 정도로 인기다. 'TTL족' 'Na족' , 들어보셨나 몰라. 011 SK텔레콤의 'TTL' 과 016 한국통신프리텔의 'Na' 가 카드 회원에게 각종 할인.무료서비스는 물론, 다양한 부가시설을 갖춘 회원 전용공간을 전국 대도시 곳곳에 제공하면서 생긴 용어라나.

창동에 사는 여대생 이영애(20.성균관대 인문과학계열)씨. 영화를 볼 때는 좀 멀더라도 꼭 삼성동 메가박스로 간다.

TTL카드 회원이라 25%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 메가박스의 경우 금요일에 한해 그 곳에서 무료관람이 가능한 Na카드 회원 친구들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음식점이나 카페 등에 갈 때도 어느 회사 휴대폰 카드 가맹점이냐에 따라 끼리끼리 모여간다. 그래서 생긴 말이 TTL족.Na족.

하지만 이 뿐이랴, 휴대폰 보급이 본격화한 지 4년, 문자메시지 사용이 상용화한 지 1년여 만에 바뀐 우리 주변의 모습이. 이달 중 무료서비스되고 있는 발신자번호표시제 역시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1 실속 데이트파의 필수품

17일 오후 6시 대학로 파랑새극장 뒤 'TTL존' . 카페같이 깔끔한 미백색 건물의 자동문이 열리며 들어선 박성준(21.성균관대 행정학과)씨는 요즘 바비인형들을 전시 중인 1층을 한번 휙 둘러보며 2층으로 향한다. CD플레이어 앞에 일단 자리를 잡은 그는 같은 과 동기인 여자친구와 부드러운 애정의 눈길을 주고 받으며 휴대폰으로 흘러나오는 최신 팝음악을 감상한다.

문예회관 소극장 인근 '나지트(NAZIT)' 에서 만난 정지훈(21.호서대 정보통신과)씨 커플도 비슷한 이유로 Na족을 자처한다. "휴학한 지 8개월쯤 되다보니 돈도 없고….

그래서 1주일에 서너 번은 여길 와요. " 바다 속을 연상시키는 파란 톤 실내장식의 3층 건물에, 컴퓨터.정보센터에서부터 DDR.미니영화관.포토갤러리.뮤직스튜디오까지 갖춰진 이곳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데 굳이 다른 곳에서 데이트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2 골라받는 묘미가 있다!

C대에 다니는 강세진(25)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람둥이. 그러나 발신자번호표시제 개시 이후 '작업 성공률' 이 평소의 반으로 줄었다. 끊임없는 구애전화로 '성공신화' 를 만들어 갔던 그로서는 '골라서 받는' 이 서비스가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반면 평소 연애에 관한 한 '자유주의 신봉자' 인 회사원 이모(36)씨는 가끔씩 '옛여인' 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처리하는 것이 고민이었는데 이 서비스가 시작된 뒤 희희낙락이다. 그녀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선별해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

또 S대생 최모(22)씨는 "군대간 친구들이 걸어오는 전화의 경우 발신자번호 앞에 '099' 가 찍혀 나오는 것은 수신자 요금부담이라는 표시라 받을 지 말 지 망설이게 된다" 고 털어놓았다.

#3 수호천사? 감시악마?

발신자번호표시뿐 아니라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등록할 때 '가족' '친구' 등 그룹을 지정한 뒤 각각 벨소리를 다르게 하는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에도 발신자를 대강 파악할 수 있어 요즘 늦은 밤 술집에선 일부러 받지 않는 전화벨 소리들 때문에 소음공해가 더 심해졌다. 귀가를 재촉하는 부모님이나 아내의 전화인 경우 일부러 받지 않았다가 나중에 "지하철에 있어서 벨이 안 울렸다" , "버스 안에서 졸다가 못 들었다" 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것.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던가. 전업주부 김모(33)씨는 남편 휴대폰과 자신의 휴대폰을 '가족찾기' 서비스에 등록했다. 상대방 휴대폰 전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 놓으면 상대방의 위치를 '○○구 △△동' 까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남편이 회사를 벗어난 경우에 대강 알 수 있다는 것. "버스가 막혀 늦었다" 는 거짓말도 안 통한다.

#4 고개숙인 그들의 정체는…

회사원 K씨(32)는 오늘도 출근길 버스에서 정신없이 휴대폰을 보다가 회사 앞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다. 만원 버스에선 신문 한번 펼치기 힘들었는데 얼마 전부터 휴대폰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 각종 뉴스들을 검색해 보는 데 재미를 붙인 것.

자칭 '엄지족' (조그만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를 이용하기 위해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는 신세대를 지칭하는 말) 고수인 고등학생 조카가 한수 가르쳐 준 덕이다.

조카는 또 요즘 친구들 사이에선 수업시간에 쪽지 대신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이 유행이라면서 "조용히 고개 숙이고 뭔가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듯한 자세 때문에 선생님들도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하는 '완전범죄' " 라고 자랑했다.

이같은 새로운 휴대폰 풍속도에 대해 '개인주의.끼리문화가 더욱 심화된다' '사생활 침해가 심각하다' 는 등 부정적 시각도 강하다.

하지만 이제 휴대폰은 단순한 편리함이나 패션.문화의 차원을 떠나 생활의 일부가 됐다. 화면으로 상대편의 얼굴까지 보며 통화할 수 있는 차세대이동통신(IMT-2000)서비스가 시작되면 이런 생활상의 변화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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