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밤비노 "86년 묵은 저주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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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루스여, 이제 평안히 잠들라'.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86년 묵은 '밤비노 저주'의 소멸도 함께 알렸다. 보스턴 시민들은 밤새 환호했다. 보스턴의 홈구장 펜웨이파크 인근 술집에 모여 TV로 경기를 본 팬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펄쩍펄쩍 뛰었다.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렸고, 흥분한 군중이 가로수를 마구 흔들어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장면도 목격됐다.

1901년 창단한 레드삭스는 18년까지 월드시리즈를 다섯 번 제패한 명문구단이었다. 그러나 20년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헐값(12만5000달러)에 판 뒤부터 월드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뚝 끊겼다. 46년, 67년, 75년, 86년 네 번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모두 3승4패로 졌다. 반대로 양키스는 루스를 영입한 뒤 26차례나 우승하며 최고 구단이 됐다.

'밤비노의 저주'라는 말은 86년 월드시리즈 때 처음 나왔다. 뉴욕 메츠에 3승2패로 앞서가던 레드삭스가 6차전에서 1루수의 어이없는 실수로 역전패하자 미국 언론들이 쓰기 시작했다. 레드삭스가 우승하지 못하는 건 양키스로 팔려간 '밤비노(이탈리아어로 아기, 베이브 루스의 애칭)'가 저주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이후 보스턴 시민들은 '저주 과자'나 '저주 아이스크림'을 종종 만들어 먹었다. 2002년에는 루스가 보스턴을 떠나면서 집 앞 호수에 빠뜨렸다는 피아노를 건져내면서까지 저주를 떨쳐내려 애썼다.

그런데 지난 9월 1일. 보스턴 시민들은 "이번에야 말로 저주가 풀린다"고 환호했다. 애너하임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레드삭스의 강타자 매니 라미레스의 파울 공이 관중석에 있던 한 소년의 앞니 2개를 부러뜨린 사건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 소년의 집이 루스가 예전에 살던 서드베리 더튼로드 558번지였다.

길조였을까.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 진출을 가리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숙적 양키스에 3연패하다가 기적 같은 4연승을 거둔다. 그리고 월드시리즈에서 기어이 우승했다. 묘하게도 소년의 앞니를 부러뜨린 라미레스는 월드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레드삭스의 우승 순간 누구 못잖게 감격한 사람은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였다. 케리는 어린 시절부터 보스턴시가 속해 있는 매사추세츠주에 살았고 이 주의 상원의원을 20년째 해오고 있다. 레드삭스 골수팬임은 물론이다. 그는 보스턴의 우승이 자신의 대선 승리와 이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연하게도 레드삭스가 우승을 결정지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홈구장 이름이 '부시' 스타디움이다. 부시 대통령의 Bush가 아니라 Busch지만 발음이 같다.

레드삭스가 지난 20일 뉴욕 양키스에 대역전극을 펼치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 케리는 환호했다. 밤비노의 저주가 풀렸기 때문에 보스턴이 고향인 자신에게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예감이다. 당시 많은 미국인은 대통령 부시를 막강했던 '양키스 제국'(구단)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뉴스위크의 조너선 앨터는 "양키스가 레드삭스에 패한 것이 왜 부시 대통령에게 나쁜 소식일까"라는 제목의 기명칼럼을 쓰기도 했다.

손장환.한경환 기자

*** '밤비노의 저주'가 깨지기까지

1901년 보스턴 레드삭스 창단

1903~18년 월드시리즈 5회 우승

1920년 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에 트레이드

1946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3승4패

1967년 〃

1975년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에 3승4패

1986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메츠에 3승4패

('밤비노의 저주'가 처음 등장)

2004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양키스에 3패 후 4연승, 월드시리즈에서 카디널스에 4연승(86년 만의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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