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법 위에 군림하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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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4.13 총선사범 처리를 둘러싼 법원의 늑장 재판과 솜방망이 처벌을 바라보는 국민으로선 역시 정치가 법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선거를 치른 지 1년이 다 되도록 항소심이 끝난 사건이 7건에 불과하고 이대로 가면 앞으로도 언제 선거사범 처리가 마무리될지 요원하다.

지난해 16대 총선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모두 70건(당선자 기준 54명)이다. 이 가운데 32건은 아직 1심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다.

또 1심판결이 내려진 38건 중 의원직 상실(의원 본인은 1백만원 이상 벌금, 가족이나 회계책임자 등은 집행유예형 이상)에 해당하는 형량이 선고된 피고인은 8명뿐인 데다 이들도 모두 항소 중이어서 과연 몇명이나 현실적으로 처벌효과를 거두게 될지 의심스럽다.

부정 선거사범의 엄중 처벌은 이론의 여지 없이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사안이다.

혼탁한 선거풍토를 바로잡기 위해 불가피한 방법이다. 선거를 앞두고 대법원과 검찰이 부정선거 사범 엄단을 강조한 것은 대국민 공개 약속이다.

그런데도 총선사범 처리가 지지부진한 것은 1차적으로 법원의 책임이다. 특히 느림보 심리는 사건 담당 재판부의 직무태만이나 직무유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사범은 의원 자격을 다투는 재판인데 피고인이 의정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출석하지 못한다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임기를 채울 속셈으로 재판을 회피하는 행위가 용납돼서는 안된다.

피고인 개인의 명예도 중요하지만 선거사범의 경우 사회공익 차원에서 개인별 불출석 사유 공개나 적극적인 구인장 발부 등 출석을 강제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솜방망이 형량도 고쳐야 한다. 선거 부정은 인정하면서 의원자격을 잃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형량을 선고하는 것은 하나마나한 처벌이다.

법원의 이같은 온정 판결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만 하면 된다" 는 심리를 부추기는 한편 법을 우습게 여기게 됨으로써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원인이 되고 이는 결국 과열.부정선거의 책임이 법원에도 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한다.

법집행을 둘러싼 형평성 시비도 문제다. 기소된 숫자가 여당의원이 많고 비슷한 사안이라도 야당의원이 여당에 비해 무겁게 처벌받는다는 것이 한나라당측의 주장이다.

1심에서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형량을 선고받은 8명은 한나라당 5명, 민주당 3명이니 숫자상으로는 이를 뒷받침한다. 또 지역적으로는 영남지역 당선자들이 다소 무겁게 처벌받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선거사범 처리를 둘러싼 늑장 재판이나 솜방망이 처벌, 형평성 시비는 선거 때마다 반복되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고질이다. 삼권분립 국가에서 엄정한 법집행을 통해 잘못된 선거풍토를 바로잡고 정치권을 정화.견제하는 것도 사법부가 해야 할 책무이자 권한이다.

사법부만이라도 제 기능을 다 한다면 오염된 정치권도 얼마든지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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