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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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46. 한은 총재의 용기

5.16이 나던 해인 1961년에 외환관리법 초안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지하 문서창고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이 만들어 준 시안(試案)이 나왔다. 미농지에 먹지를 대고 골필로 쓴 이 안은 영국의 외환관리법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외환관리법은 이렇게 해서 IMF 안을 따르게 됐다.

IMF는 영국의 외환관리법을 토대로 일본의 외환관리법 초안도 만들어 주었다.

그 당시 외환관리법 제정이 미뤄지고 있었던 것은 한국은행과 재무부가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은은 외환관리에 관한 권한을 금융통화위원회가 보유하기를 바랐다. 재무부는 재무부대로 주무부처로서 직접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재무부가 기초한 안이니 초안은 당연히 '대통령령이나 재무부 장관이 정한 바에 의하여…' 라고 돼 있었다.

원안(原案) 통과가 기정사실화되려는 순간 유창순(劉彰順) 한은 총재(전 총리)가 불쑥 일어섰다.

"의견이 있습니다. "

박정희(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해 모든 참석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혁명정부의 서슬이 퍼럴 때였다.

"외국 금융기관과의 업무에 관한 은행의 거래(코레스계약)는 금융기관과 관계가 있으니 금통위가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원안엔 물론 재무장관의 권한으로 되어 있었다. 온화한 인상의 신사로만 알았던 분이 돌연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한은의 수장으로서 법안 통과 자체를 반대하고 싶었겠지만 군인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 작은 저항을 한 것이었다. 실로 대단한 용기였다.

당시 나는 최고회의 소속 군인들과 같이 작업을 했었다. 물만두를 시켜 먹으며 격의 없이 어울렸지만 군인은 군인이었다. 최고회의의 유모 대령은 툭하면 "25센트면 문제가 해결된다" 고 말했다. 25센트는 45구경 권총 총알 한 발의 원가였다. "까불면 없다" 는 위협이었다.

朴의장의 시선이 이번엔 재무장관쪽을 향했다. 재무장관은 배석한 이재설(李載卨) 외환과장(전 농수산부 장관)을 돌아봤다. 이과장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그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하며 귀엣말로 속삭였다.

"받으십시오. 아무 문제 없습니다. "

어차피 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는 자유화될 것이었다. 그 선에서 제동이 걸려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이과장이 장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무장관의 일성(一聲)이 다시 침묵을 깨뜨렸다.

"한은 총재 안을 받겠습니다. "

외환관리를 둘러싼 관치금융의 주도권 싸움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외환관리법 제정은 관 주도형 금융 시스템의 출발점이었다. 외환관리법이 재무부 뜻대로 제정됨으로써 재무부가 중심에 선 금융 시스템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외환과 관련한 허가사무가 재무부로 넘어오게 됐다.

당시 나는 허가사무엔 별 관심이 없었다. 이후로 만들어 진 외환관리에 관한 규정은 모두 내 손을 거쳤지만 나는 허가사무를 다른 과에 다 넘겨 줬다. 저마다 서로 권한을 차지하려고 할 때였다.

현금차관.D/A유전스.외화대부.수출선수금 등 많은 규정을 직접 만들었지만 이런 처신 덕에 나는 정치자금이니 스캔들이니 하는 덫에 걸리지 않았다. 반면 허가사무를 맡았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단명하고 말았다. 당시 외환과엔 정지복(鄭志複)이라는 고참 주사가 있었다. 최고참인 데다 나이까지 많아 주사관으로 불리던 그는 외환과의 명물이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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