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가신정치 또 고개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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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해 12월 정동영(鄭東泳)최고위원의 '2선 퇴진론' 에 떼밀려 최고위원에서 물러났던 민주당 권노갑(權魯甲)씨가 28일 서울 마포에 사무실을 열고 일선 복귀를 선언했다.

동교동계의 맏형으로 불리는 그의 재등장이 당 총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뤄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동안 고질병처럼 여겨졌던 측근정치, 가신(家臣)정치가 또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무실 개소식에서 權전위원 등이 발언한 내용을 보면 이런 걱정이 기우(杞憂)에 그치지 않을 듯하다. 權전위원은 자신을 공격한 정동영 최고위원의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자리를 함께 했던 동교동계 인사는 "(鄭위원을)얼마나 좋아하고 높이 평가했는데 의리없이…" 라며 "소영웅주의를 용납할 수 없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당 정책위의장까지 "오랫동안 민주화에 헌신한 權전위원에게 鄭위원이 사과해야 한다" 고 거들었다고 한다. 구주류가 약속이나 한 듯 한 목소리를 낸 셈이다.

우리는 정치인들간의 사감(私感)이나 알력 표출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현 정권의 실력자로 거론되는 사람이 2선으로 물러났다가 사적 감정을 드러내며 재등장하는 모양새가 석연치 않을 뿐이다.

權전위원이 2선으로 물러났던 지난해 12월은 각종 비리사건으로 세상이 연일 시끄러웠으며 국정의 기본틀을 다시 짜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대를 형성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權전위원의 퇴진은 가신정치의 청산을 상징했다. 그런데 겨우 3개월 남짓만에 다시 요란스레 정치일선에 재복귀하면서 반대측 의원을 손보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니 당시의 조치는 비판여론을 비켜가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던 것인지 묻고 싶다.

현 정권은 개혁정책이 좌초할 때면 기득권층의 저항을 비난하고 소수파 정권의 어려움을 호소해왔다. 그러면서도 지지세력의 외연(外延)을 넓히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어려울 때마다 가신정치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민주적인 정치발전이 어떻게 이뤄질 것인지 그점이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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