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사과 (謝過)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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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077년에 일어난 '카노사의 굴욕' 의 발단은 로마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의 서임권(敍任權)다툼이었다. 서임권은 주교.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를 지명하는 권리. 당시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는 서임권을 고집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부터 파문당한 데다 제후들의 반란이 겹쳐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는 한겨울에 교황이 머물고 있던 북부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을 찾아가 눈 속에서 3일 동안 서서 용서를 빈 끝에 간신히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훗날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교황직에서 축출함으로써 보복에 성공했다.

우리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일로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을 빼놓을 수 없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인조가 1637년 1월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꿇고 항복한 사건이다. 이때 청의 강요로 세운 '대청황제 공덕비' (삼전도비)는 지금도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남아 있다.

사과나 사죄라 해서 모두 창피한 것은 아니다. 중국 한나라의 건국공신 한신(韓信)이 젊은 시절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의 가랭이 밑을 거리낌없이 기어나갔다는 고사는 역으로 그의 큰 그릇과 웅지(雄志)를 말해주는 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5년 만인 1970년 12월에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독일총리의 사과도 감동적이었다. 그는 43년 바르샤바의 유대인 집단거주지역(게토)에서 벌어진 대(對)독일 항쟁을 기리는 기념비 앞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독일 내에서는 그의 파격적인 과거사 사죄방식을 놓고 한동안 찬반양론이 분분했지만 역사는 브란트의 편이었다. 브란트는 나중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동을 행동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2차 세계대전 때 살해된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을 생각했다" 고 회고했다.

요즘 대통령 다음가는 권력자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권노갑(權魯甲)전 민주당최고위원이 지난해 자신의 2선퇴진을 주장했던 같은 당 최고위원을 겨냥해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고 말했대서 화제다.

"대한민국에서 나를 다 아는데 명함이 무슨 필요 있느냐" 는 그의 호언(豪言)과 매서운 사과 요구를 함께 곱씹어보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왠지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진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데 나중에 어떡하려나 하는 괜한 노파심도 든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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