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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헷파초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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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4박5일 동안 3000여 명에 달하는 항모 승조원은 홍콩에서 쇼핑을 즐기며 휴가를 보냈다.

하루는 쇼핑가에서 한참 떨어진 카우룽통(九龍塘)의 한 양로원에 승조원들이 나타났다. 아시아계·흑인·백인·스페인계 등으로 섞인 승조원 21명은 홍콩에 둥지를 튼 미국 기업 디즈니랜드 직원들과 함께 만두를 빚고 영어로 번안된 중국 전통 노래를 불렀다. 광둥어 새해 인사말인 ‘공헷파초이(恭喜發財·부자 되세요)’가 열 번도 넘게 나오는 노래였다. 미키마우스 모자를 쓴 홍콩 디즈니랜드 직원들은 노인들 사이에 앉아 미군들의 인사말과 동작의 의미를 광둥어로 설명했다. 노인들의 얼굴은 환해졌다. 서른 명이 넘는 내외신 기자들은 미군과 노인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손님들에게 인심 넉넉해지는 명절 효과까지 덤으로 얻은 행사였다.

행사를 기획·지원한 미국 총영사관 관계자는 “승조원들이 휴가를 보내러 왔지만 놀러만 온 게 아니다”며 “전 세계를 작전 범위로 하는 미군이기 때문에 현지 사람들과 여론에 좋은 인상을 쌓는 공공외교 활동은 필수”라고 소개했다. 이날 하드파워의 상징인 항모를 타고 온 미 해군 승조원들은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과 함께 미소와 상냥함으로 포장된 또 다른 미국의 이미지를 홍콩에 심었다.

춘절 연휴의 대미를 장식하는 위안샤오제(元宵節·정월 대보름)인 지난달 28일 4박5일 일정으로 한국의 유력 정치인이 의원외교 명목으로 홍콩을 방문했다. 그는 홍콩특구의 행정장관을 비롯해 입법회 의장·홍콩총상회 관계자 등 홍콩 정·재계 유력 인사들을 포함해 선전의 한국 상공인들까지 만나는 등 하루에 7~8개 일정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했다고 한다. 그의 의원외교 현장을 주목하는 홍콩의 신문·방송·인터넷은 없었다. 그는 지역구에서 3선을 한 대중 정치인인 데다 고급스러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의원으로 통한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컸다. 그간 홍콩에 오는 유력 인사들의 동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지 여론과 소통하는 일이 없었다.

홍콩은 길이 115m에 달하는 삼성전자의 초대형 옥외 전광판이 설치된 곳이다. 삼성전자 측은 “중국 대륙·아시아의 소비자들에게 삼성 브랜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전략 홍보지역이 홍콩”이라고 설명한다. 중국 대륙의 관문인 홍콩에서 쌓은 국가 이미지는 강한 추동력을 갖고 아시아와 중국 대륙으로 퍼지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정치인이든 공직자든 해외에 나오면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다. 상대국의 정치인·관료들과 인맥을 쌓고 신뢰를 확대하는 일 못지않게 현지의 일반 대중과 접촉면을 넓혀 대한민국 브랜드를 알리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도 국익을 증진하는 일이다. 우리도 삼성·LG·대한항공 같은 세계적 브랜드가 있다. 매력적인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홍보 자원들과 기업 브랜드를 잘 결합해 현지인들과 만나면 국가 브랜드 상승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용환 홍콩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