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밖에서 보는 한국, 우리 안의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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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008년 말부터 해외 유력 언론들은 “한국이 외채 때문에 국가부도에 빠질 것”이란 비관론을 쏟아냈다. 외국인들이 털고 나가면서 코스피 지수는 1000 아래로 추락했다. 그 투매물량을 국내 기관들과 개미투자자들이 받아냈다. 외국인들이 땅을 친 것은 지난해 봄.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승자로 판명되면서 코스피가 50% 이상 반등한 뒤였다. 외국인들이 뒷북 친 것은 조선업체의 선물환 거래를 오해한 데서 비롯됐다. 배가 인도되고 수주대금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부분이 엄청난 단기외채로 잡혔기 때문이다.

이 무렵 금융위원회의 대처는 참고할 만하다. 금융위는 런던·뉴욕·싱가포르에서 투자설명회(IR)를 열 때마다 꼭 현지 유력 언론사를 방문했다. 그렇다고 간부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실무진이나 현장 기자들과 주로 접촉했다. 기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핏대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금융위가 정성껏 만든 보고서와 통계자료를 제공하면서 “앞으로 우리 측 자료도 참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근 해외 유력지들에 ‘한국 때리기’ 기사가 자취를 감춘 것은 이런 노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봉변을 당했다. 한 특파원이 “한국의 여성 사회 참여율이 저조한 것은 룸살롱 등 잘못된 접대 문화 때문이 아니냐”고 물었다. 윤 장관의 대응능력은 돋보였다. 차분한 어조로 “신임 검사 중 절반이 여성이며 가정에서 한국 여성만큼 경제권을 가진 나라도 없다”고 답변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재부는 공보 서비스를 중단하고 미국 본사에도 항의서한을 보낼 모양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과잉반응이다. 원래 기자회견에는 온갖 민망한 질문이 오간다. 1998년 한·미 정상회담 때 미국 기자들은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르윈스키의 투피스에 묻은 액체가 당신 것이 맞느냐”며 물고 늘어졌다. 짜증스럽게 자리를 뜨는 그의 뒤꼭지를 향해 이런 질문까지 꽂혔다. “그때 당신의 느낌을 말해 달라.”

권위주의 정권 때 해외 언론의 서울특파원들은 좋은 시절을 보냈다. 일부는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을 뽐냈다. 해외여행 때 현지 한국 외교관들을 수족처럼 부려 눈총을 받은 특파원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 바뀌었고 세상이 변했다. JP모건의 임지원 상무는 “요즘에는 한국에 오는 고객을 모시기에 바쁘다”고 했다. 예전에는 미국에 건너가 투자설명을 했지만 최근에는 대형 고객들이 직접 한국에 건너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문만 보고는 감을 잡을 수 없다”며 한국 경제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한다.

최근 세계적인 금융회사들은 한국 데스크를 대거 바꾸고 있다. 한국이 이머징 마켓일 때는 젊은 신참이 맡아 편향된 리포트를 낸 적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풍부한 경험을 갖춘 전문가들로 물갈이 중이다. 한국이 돈이 되는 선진시장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 영역도 주식에서 채권까지 넓어지고 있다. 얼마 전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 국채가 미국 국채보다 훨씬 인기를 끌며 소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 경제를 읽는 외국 신문 독자들의 입맛도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 특파원이나 그가 쓴 기사에 대한 판단은 그들 독자에게 맡길 일이다. 정부가 옥신각신 닭싸움할 때는 아니다. ‘밖에서 보는 한국’이 아찔한 속도로 변하는 만큼 ‘우리 안의 한국’도 빠르게 변해야 하지 않을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