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러시아 스파이전쟁 '후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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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국과 러시아간의 스파이 전쟁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21일 워싱턴에 있는 러시아 대사를 불러 러시아측 외교관 여섯명을 추방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파월 장관은 또 올 여름까지 45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가로 추방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번 러시아 외교관 추방조치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연방수사국(FBI)의 방첩부서 요원이었던 로버트 핸슨이다.

그는 지난 15년간 옛소련과 러시아의 스파이로 활동하며 6천쪽 분량의 기밀자료를 포함해 각종 정보를 넘겨줬다. 핸슨은 지난달 체포됐는데 러시아측으로부터 1백40만달러(약 18억2천만원)어치의 현금과 다이아몬드를 대가로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FBI는 핸슨 사건을 수사하면서 핸슨에게서 정보를 넘겨받은 러시아인 여섯명의 신원을 밝혀냈다. 1차로 추방된 러시아 외교관이 바로 그들이다.

미 CBS방송은 수사기관 소식통들을 인용해 이번 외교관 추방조치는 핸슨 사건을 구실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정보요원들의 숫자를 줄이려는 의도도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정보요원들은 모두 4백50명쯤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옛 소련 시절 국가보안위원회(KGB)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뒤부터 러시아는 정보활동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복에는 또다른 배경도 있다.

핸슨이 러시아측에 귀띔해주는 바람에 미국이 1980년대 초부터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관 땅밑에 비밀터널을 뚫어 정보수집을 해온 사실이 들통나 망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도청용 비밀터널은 FBI와 국가안보국(NSA)이 공동으로 설치했으며 당시 미국은 모스크바에, 소련은 워싱턴에 자국 대사관 건물을 세우던 중이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터널을 뚫고 장비를 설치하는 등의 첩보활동에 미 첩보기관의 단일 공작비로는 가장 거액인 7억~8억달러가 들었다" 면서 "그러나 핸슨이 언제 이 정보를 누설했는지, 터널 작전으로 얼마나 귀중한 정보들을 빼냈는지는 미지수" 라고 최근 보도했다.

이번 외교관 추방조치 이전에 미국이 마지막으로 외교관 대량추방을 단행한 것은 냉전 때인 86년이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 외교관 5명이 소련에서 추방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소련 외교관 55명을 내쫓았다.

99년에는 러시아 스파이가 워싱턴 국무부 청사 외곽에서 도청을 하다가 FBI의 비디오에 찍혀 추방됐다. 그러자 러시아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 여직원 한명을 간첩으로 체포한 뒤 추방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번 외교관 추방조치가 '심각한 적대적 행동' 이라며 그에 상응한 보복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냉전은 끝났지만 스파이 전쟁은 진행 중이다.

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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