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축구와 종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펄 벅의 『대지(大地)』에 등장하는 주인공 왕룽(王龍)은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메뚜기떼와 한판 대결을 벌인다. 논에 불을 지르고, 도랑을 파고, 며칠을 메뚜기들과 힘겨루기를 한 끝에 드디어 메뚜기떼를 물리친다.

그런데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럼 그 메뚜기떼는 어디로 갔을까. 혹시 이웃 마을의 농작물을 다 갉아먹고 있지 않았을까. 왕룽 일가와 주민들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을 때 이웃사람들은 목놓아 울고 있지 않았을까.

프로축구 성남 일화의 연고지 문제를 놓고 성남시와 일화 축구단, 성남시 기독교연합회와 축구인들, 그리고 프로축구연맹이 뒤엉켜 있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생각난 것이 바로 '메뚜기' 였다.

사태의 발단은 이렇다. 천안을 연고지로 하던 일화 축구단이 지난해 성남으로 옮겨왔다. 그러자 성남시 기독교측에서 '이단인 통일교를 모태로 하는 축구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 며 성남시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시달리던 성남시장은 급기야 올해 초 일화 축구단에 '성남을 떠나라' 는 통보를 했다.

당연히 반발이 나왔고 축구연맹이 중재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축구인과 기독교인 간에 충돌이 예상되는 등 더 꼬여가기만 한다. 축구인들은 연일 항의시위를 하고 성남시 기독교연합회는 축구경기가 열리는 날 축구장 앞에서 대규모 기도집회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축구와 종교. 묘하게 꼬였다.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전쟁' 이다.

축구 전쟁도 있었고 종교 전쟁도 있었다. 타협이나 양보보다 승패(勝敗)와 선악(善惡)을 가리는 속성 때문인가. 이대로 가면 충돌을 면할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솔로몬의 지혜' 가 필요할 때다.

축구를 종교적인 문제로 변질시킨 잘못을 따지기 전에 궁금한 게 있다. 과연 성남시 기독교인들은 일화 축구단을 성남에서만 내쫓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천안의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뭐가 되나. 목표했던 대로 일화 축구단이 다른 도시로 연고지를 옮긴다면 그곳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과연 "우리는 승리했다" 며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을까. '성남' 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묶이지 않고 전체를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의 평지풍파는 없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내년 월드컵축구 공동개최국이다.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지금은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준비도 잘 하고, 대회도 잘 치르고, 좋은 성적도 올려야 할 때다. 이런 때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힘을 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단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월드컵부터 치르자. 상처는 남았지만 '없었던 일로 하자' 는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원칙에 따라 성남 기독교연합회 측에서 무조건 철회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축구인들도 무조건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이번 일로 모두가 상처를 입었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러나 축구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상대에게 기어코 '항복' 을 받아내려고 하면 해결방법이 없다. 양보를 하면 우선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줄 수 없으면 아이를 둘로 나눠 달라" 던 가짜 엄마와, "아이를 죽이지 말고 차라리 가짜 엄마에게 주라" 던 진짜 엄마. 솔로몬은 진짜 엄마에게 아이를 주었다.

손장환 체육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