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잘하면 달러 만진다" 평양에 영어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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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북한의 대외 활동이 급속히 늘면서 평양에도 영어붐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영어를 잘 하면 달러를 만질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외국어학원 입학경쟁이 치열하다.

평양과 지방도시에 있는 6년제 외국어학원은 명칭이 '학원' 이지만 한국의 영어학원이 아닌 '외국어고등학교' 에 가까운 정규 전문교육기관이다. 북한 청소년들은 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 이곳을 나오면 다음 단계로 평양외국어대학이나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국제관계대학 등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양의 영어붐은 1990년대 초부터 나타났다. 신의주 남상고등중학교에서 물리교사로 재직했던 김은철(99년 귀순)씨는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자 러시아어 대신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고 말했다.

북한에선 인민학교(초등학교)4학년 때부터 영어를 가르친다. 문법으로 보면 북한의 영어교육은 그렇게 낮은 수준이 아니다. 4학년 영어 교과서는 알파벳에 이어 바로 Be동사.부정문.의문문.Have동사.조동사를 다룬다.

그러나 북한도 영어회화에서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회화 테이프 등 시청각 교재는 물론이고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지난해 10월 평양을 찾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영어교사 파견을 요청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북한 평양외국어대학 등에서 양성된 외국어 일꾼들은 교직자가 되거나 당 국제부.외무성.무역성.외국합작기업 등 이른바 '물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

북한 최고의 영어통으로는 이혁철이 꼽힌다. 당 국제부 지도원인 그는 金위원장의 1호 통역으로 金위원장이 올브라이트 장관과 회담할 때 통역을 맡았다.

지난해 10월 조명록 북한군 차수의 방미 때 수행한 외무성 소속 이광철(45) 번역국 과장과 최선희 지도원도 대표적인 통역사다. 한편 50을 넘은 외무성의 고참 외교관들은 뒤늦은 영어공부로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전에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를 전공한 이들이 이제 밤늦게까지 영어사전을 뒤적이는 것이다. 북한 외무성 미주국 부국장으로 재직 중인 한성렬(53)은 '늦깎이' 로 영어공부에 성공한 사례다.

그는 3년 남짓했던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체류기간을 적극 활용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98년 서울에 온 김순영(25.고려대 신방과)씨는 "영어는 이미 러시아어를 제치고 북한의 제1외국어로 자리잡았다" 며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북한에서 영어공부 바람은 더 거세질 것" 이라고 말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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