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로 연하장 … 30개국 '절친' 300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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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호 22면

해외영업 14년차인 성수선씨. 상대방을 기억하고, 나를 알리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해외인맥을 만들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의 사진 위로 ‘New Year’s Greetings from Susan’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2010년이 당신 생애 가장 행복한 해가 되길 바라며’란 글로 시작하는 연하장 속 사진의 주인공은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 담당 성수선(37) 과장. 그는 지난해 말 직접 만든 연하장을 세계 30개국 바이어와 친구 300여 명에게 보냈다. 내용은 모두 달랐다. 받는 이와의 관계를 되돌아보며 편지 형식의 글을 넣었다. ‘내년에도 아마추어 사진작가인 남편과 촬영을 위한 여행 많이 다니세요. 좋은 사진 나오면 제게도 보내주세요’처럼 바이어의 가족관계까지 감안했다.

글로벌 인맥관리의 고수 성수선 삼성정밀화학 과장

“인쇄된 인사말에 이름만 써서 보내는 카드는 기억에 안 남잖아요. 나를 기억하게 하고, 좀 더 친해질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연하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자비를 들여 연하장을 만든 지 6년째다. 처음엔 캐리커처를 그려 넣거나 기존 사진을 합성해 카드를 만들었다. 2006년부터는 한복도 차려입고, 메이크업을 한 뒤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사진을 찍어 연하장에 넣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카드를 받은 해외 바이어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내년 카드 컨셉트는 뭐냐”고 미리 묻거나, 연하장을 1년 내내 책상에 붙여놓는 바이어도 꽤 있다고 한다. 그를 ‘미스 성’이 아닌 ‘수선’으로 부르는 이도 많아졌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로 발전했다는 의미로 업무까지 한결 수월해졌다.

“급하게 연락해도 미팅 날짜를 잡아주고, 좀 귀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도 기꺼이 해주는 사람이 많아요. 뭔가를 파는 영업사원이 아니라 친구로 받아들여주는 거죠.”
성 과장은 “국내영업도 마찬가지지만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인맥은 특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주 만나지 못하고, 언어와 문화가 달라 ‘아는 사람’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기 때문이다. 말과 문화도 다르고,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기까지 한 만큼 관계를 만들기 위해선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해외영업 14년차인 성 과장으로부터 해외 인맥을 만드는 노하우를 들어봤다. 그는 CJ제일제당에서는 약을, LG전자에서는 TV를 해외에 팔았다. 2003년부터 삼성정밀화학에서 화학 기초 소재의 해외 영업을 맡고 있다.

성수선씨가 직접 만들어 보낸 연하장.

해외 인맥 300명에게 개별 안부를 전하려면 상대방을 기억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성 과장은 대화의 특징을 메모하는 방법을 쓴다. 그는 새로운 사람을 만난 뒤 그와 했던 대화나 특징을 메모한다. ‘안경 쓰고 대머리, 홀쭉하다’ 같은 인상착의를 적는 게 아니다. 다음 번 만났을 때 렌즈를 끼거나, 머리카락을 심거나, 살이 쪄 있으면 이런 정보는 무의미해진다. 그보다는 ‘남편이 아마추어 사진작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와 이름이 같다며 미술 이야기를 함’과 같은 걸 적고 다음에 만날 때 화제로 삼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야깃거리가 많아야 한다. 그는 벨기에 바이어를 만나면 “벨기에 맥주 참 좋아하는데…”라며 이야기를 꺼낸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호주인들을 만나기 전에는 스포츠에 관한 최신 기사를 찾아본다.

음식은 친해지기 좋은 매개체다. 비즈니스 미팅을 한 뒤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 온 외국인 손님에게 식사를 접대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전날, 또는 점심에 어디에서 뭘 먹었는지 물어본 뒤 메뉴를 정하는 센스가 필요해요. 몇 끼째 갈비를 먹었다며 냄새만 맡아도 괴롭다고 푸념하는 걸 들은 적 있어요. ‘내 평생 먹을 불고기를 나흘 동안 다 먹었다’고 한 친구도 있었어요. 다이어트 중인 여성 바이어를 한정식집으로 모시는 건 서로에게 낭비죠.”

그는 외국인 친구들을 숨어 있는 맛집에 데려가면서 더욱 친해졌다고 한다. “한국에 몇 번 와본 친구들은 혼자서 못 찾아가는, 현지인들만 아는 맛집에 데려가면 좋아해요.” 이때 음식에 대해 풍부한 설명을 곁들인다면 그 사람을 확실히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작은 선물이 유용할 때가 있다. “고가의 선물은 뇌물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비싼 걸 해선 안 돼요. 대만과 필리핀 같은 동남아 국가에서는 한류 가수의 음악 CD나 영화 DVD를 선물하면 회의 분위기가 좋아져요. 가수 비를 좋아하는 필리핀 고객을 위해 줄을 선 끝에 선착순으로 주는 자필 서명 CD를 손에 넣은 적이 있어요. 바이어가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더라고요.”

아무리 친해져도 지키는 원칙이 있다. 상대방이 먼저 얘기하기 전에 가족 이야기는 묻지 않는다. 결혼이나 자녀에 대해 묻는 건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하거나 동성연애, 재혼 가족 등 가족 형태가 다양해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거든요.”

친해지는 법은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중국인은 처음 만나도 술을 먹고 빨리 친해지려는 경향이 있더군요. 아랍인들은 어깨동무 같은 스킨십으로 친근감을 표현하고요. 하지만 유럽인들은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둬야 합니다. 그런데 유럽 중에서도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는 또 굉장히 스스럼없이 대해요. 저녁식사 자리에 가족을 데려오기도 하고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해요. 일본인들은 보수적이고 관계를 중시하는 편이어서 거래처를 함부로 바꾸지 않더라고요.”

이름도 언어도 낯설다 보니 상대방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여러 명이 함께 만나는 경우 운이 나쁘면 ‘미스터 킴’만 네댓 명 있을 수 있어요. 발음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름 표기도 DS HJ처럼 이니셜을 쓰는 경우가 많고요. 옷차림도 비슷비슷한데 이름이 모두 이니셜이면 상대방이 기억해주기 어렵죠.” 성 과장은 한글 이름이 어려우면 이니셜 대신 영어 이름을 쓰라고 제안한다. 또 이색적인 액세서리로 외모에 포인트를 주는 방법도 즐겨 쓴다. 그는 “해외 출장 갈 때 짐을 최소한으로 싸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게 아니라 깔끔하면서 인상적인 복장과 액세서리를 챙겨 가 기억할 만한 인상을 남기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이렇게 착실하게 다져놓은 인맥은 어떤 도움이 될까. 그는 “세계 웬만한 도시에 친구가 있으니 이처럼 든든한 백은 없다”고 말한다. “한번은 그 나라 경제 전망에 관한 조사 자료가 필요했어요. 어떻게 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예전에 알고 지내던 광고회사 사람이 떠올랐죠. 그 친구를 통해 리서치 회사 사람을 소개받아 수월하게 자료를 얻었어요. 처음 가는 나라에서는 가격 대비 좋은 호텔이나 숨은 맛집 같은 쏠쏠한 정보도 챙기죠.”

성 과장의 ‘끈질긴’ 인맥 관리는 업무에서도 빛을 발한다. 오랜 세월 연락을 하고 지낸 ‘전임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 상대 회사 담당자가 바뀌면 전임자와는 연락이 끊어지고 새 담당자에게 공을 들이게 된다. 그런데 성 과장은 전임자들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더니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었다고 한다.

“안 좋은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언제가 좋을지 모르겠다”고 전임자에게 물었더니 “지금 그쪽 분위기가 별로 안 좋으니 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는 답을 받기도 했다. “그 친구는 노 프라블럼이라고 해도 방심하면 안 돼. 말버릇이 노 프라블럼이야”라고 후임자의 성격을 알려준 전임자도 있었다. “전임자는 회사 내부 분위기와 해당 업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죠. 친구가 되면 많은 이야기를 서로 할 수 있게 돼요. 어떤 고객회사의 경우 현 담당자 이전 전임자 4명과 모두 연락하고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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