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의 세계를 추구하는 ‘고소득 전문 킬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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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호 04면

1920년대 말. 중국 상하이 출생. 러시아 백작부인과 독일 귀족 사이의 혼혈 사생아. 무국적자. 조실부모한 뒤 상하이 주둔 일본군 장군의 양자로 성장. 7개 국어 구사. 2차 대전 중 일본에서 거주. 바둑·무술·방중술의 달인. 전범으로 잡혀 고통받는 양부를 재판 직전 살해. CIA가 에스피오나지 요원으로 지목. 중국에서 암살작전 수행. 그리고 잠적. 고소득 전문 킬러로 활동하다 은퇴.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 - 트레베니언의『시부미』

트레베니언의 『시부미』(1979)에 나오는 주인공, 니콜라이 헬이다. 그가 홀로 미국 정보기관의 음모에 맞서 싸운다는 게 줄거리다. 이런 장르에선 흔한 얘기다.그런데 책의 핵심은 헬의 개인사에 있다. 장르를 떠나 작가의 상상력이 창조한 캐릭터 가운데 이보다 더 기발한 게 있을까 싶다. 헬은 ‘시부미의 인간’이다. 양부인 기시가와 장군의 가르침에 따라 헬은 ‘시부미’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시부미’는 일본 한자로 ‘渋味’라 쓴다. 정확한 뜻을 옮기긴 어렵다. 욕망을 억제하는 절제심, 충동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자신을 이겨내는 극기심, 그리고 그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경지를 말한다.

“태도로 말하자면 수줍음을 띠지 않는 겸손, 예술에 있어서는 우아하면서도 명확·정연한 간결성,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고요한 정신상태에서 생성의 고뇌를 벗어난 존재다. 인격에 있어선 뭐랄까, 지배력을 수반하지 않는 권위랄까.”
스릴러답지 않게 이런 형이상학적인 대화가 많이 나온다.

“나는 정말 나인가? 내가 정말 여기에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정말 나란 말인가.”
“내 일생은 시간이 모자라 다 그리지 못한 채 스케치만 해놓은 그림 같다.”
“미래와의 관계를 딱 끊자 과거의 일들이 사소한 사건들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액션신도 짭짤하다. 이게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첫 장에 나오는 로마공항에서의 총격신을 보자. 참혹한 현장을 찍은 필름을 슬로 모션으로 한번은 그대로, 그 다음엔 거꾸로 돌려 보는 장면이다. 총알이 박히는 모습, 반대로 총알이 빠져나가는 화면 묘사가 기막히다. 젤라틴으로 차여진 공간에서 발레라도 하는 듯한 동작들, 그대로 베껴놓기 전에는 전달할 수가 없다. 이 필력, 한마디로 괴력이다.

B급 취미를 A급 문장에 담아낸 이 작풍이 작가의 전매특허다. 평론가들은 ‘트레베니언스럽다(Trevanianesque)’고도 한다.곳곳에 미국 물질문명에 대한 경멸과 일본 문화에 대한 칭송이 넘치는 것도 특징이다. 헬은 “모든 미국인들은 장사꾼이며, 양키 정신의 중심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반면 ‘시부미’를 일본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치켜세운다. 작가의 일본 취향이 잘 나타나 있다.

진지한 독자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애들 장난하냐며. 그러나 실제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작가의 글 솜씨는 초강력 접착성을 지녀, 한번 준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트레베니언은 복면작가로 유명하다. 대학교수 킬러가 나오는 『아이거 생션』(1972), 사실주의 추리소설 『더 메인』(1976), 심리소설 『카티야의 여름』(1983), 웨스턴 『21마일』(1998)등…. 작품마다 장르가 너무 달라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게 장기다. 그래서 트레베니언은 한 필명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작가 그룹이라는 말도 나왔다. 결국 텍사스대 방송영화학부 교수였던 로드니 휘태커(1931~2005)가 주인공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 해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니콜라이 헬처럼 바스크 지방에서도 오래 살았다.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경제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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