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똑똑한 의사들의 판단착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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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에서 의사가 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수능성적 상위 1%에다 6~12년간 고된 단련을 받는다. 이런 똑똑한 의사들의 해외 탈출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미국에 가면 편하고 보수도 넉넉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의사자격시험(USMLE)에 응시한 의사는 800여 명. 인터넷 카페 회원은 1만3000명에 달한다. USMLE 학원들도 성업 중이다. 토·일요일이면 수십 명의 의사들이 몰려와 하루 7시간씩 머리를 싸맨다. 그런데도 USMLE 합격률은 신통치 않다. 지난해 4차 관문까지 통과한 비율은 7% 남짓하다.

외국 의사가 되려면 더 쉬운 길이 있다. 경남의 거창국제학교엔 글로벌 의학 코스가 있다. 4년 전 헝가리의 국립 데브레첸 의·치대와 손잡고 개설한 학과다. 수업은 영어와 헝가리어로 진행한다. 그동안 데브레첸대로 떠난 유학생만 줄잡아 40여 명. 유학 경비가 미국 의대의 30%에 불과한 데다 이 대학을 졸업하면 쇼프론은 물론 EU 어디서든 개업할 수 있다. 이 대학 출신의 USMLE 합격률은 무려 90%다. 거창국제학교의 김재윤 행정실장은 “한때 모집정원 15명도 못 채웠지만 요즘 입학경쟁률은 3대 1을 넘는다”고 했다. 이런 우회로가 개척되면서 다른 대학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올해는 성신여대가 USMLE를 겨냥한 글로벌의과학과를 열었다.

지금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가장 큰 고민은 내수 확대다. 그 핵심은 서비스산업 육성이다. 일자리와 경제성장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지름길이다. 윤 장관은 지난해 말 영리의료법인을 도입하려다 실패했다. 물론 영리의료법인 자체가 고용이나 후생에 미치는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돌파하지 못하면 다른 생계형 근로자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차문중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이로 인해 그후 정부가 시도한 전문자격사 진입규제 완화도 늪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의사들은 놔두고 왜 불쌍한 우리만 괴롭히느냐”는 약사·세무사·안경사들의 반발에 부닥친 것이다.

이대로 가면 서비스산업 육성은 한 발짝도 나가기 어렵다. 일부 사회단체는 “의료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며 “영리법인이 도입되면 없는 사람만 죽어난다”고 위협한다. 덩달아 “의대 입학정원을 줄여야 의료 서비스의 질이 높아진다”는 개업의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헝가리의 국민 1인당 의사 수는 한국보다 2배나 많다. 그런데도 불평은 찾을 수 없다. 헝가리 의사들은 오히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쇼프론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아시아 영리의료법인들의 약진도 눈부시다. 의료관광 허브인 싱가포르의 래플스 병원이나, 수많은 외국 환자가 찾는 태국의 범룽랏 병원은 아예 주식이 거래소에 상장돼 있다. 이들 병원은 거액의 해외자금도 유치해 서비스 수준을 끌어올린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국내 관광회사들은 “서울의 쌍꺼풀 수술 비용으로 태국에선 전신 성형이 가능하다”고 유혹한다. 글로벌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의사 배출시스템은 다양화하고 있다. 살아남으려면 경쟁을 받아들이고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내 의사들은 발 밑의 우물만 깊이 파는 느낌이다. ‘벨기에 치과의사’의 비극이 남의 일이 아니다. 미 해군사관학교 자카리 쇼어 교수의 “똑똑한 사람일수록 생각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경고가 생각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