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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키운 ‘붉은 전문 인력’, 소련의 새 특권층 형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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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스탈린(1879~1953년·왼쪽 셋째)은 프롤레타리아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당원과 노동자의 대학 입학을 장려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5세부터 판금공(板金工)으로 일하던 흐루쇼프(1894~1971년·왼쪽 둘째)는 1929년 모스크바의 스탈린공과대에 입학, 교내의 당위원회 서기로 활동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다. 그는 4반세기 동안 소련을 독재적으로 통치하면서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냉전 시대의 스탈린 체제 연구는 폭력의 원인을 주로 스탈린 개인의 특성이나 일당 독재에서 찾았다. 하지만 스탈린 시대의 테러 정치는 지배자와 소수 당원만으로는 불가능했다. 테러에 의한 통치는 사회적 지지 기반 없이는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폭정을 통해 이득을 얻는 광범위한 사회계층이 있어야 했다. 이 역할을 맡은 것이 ‘프롤레타리아 전문 인력’이었다.

1928년 주도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위로부터의 혁명’을 내세우며 급속한 공업화를 결정했다. 문제는 전문 인력 확보였다. 1920년대 말까지 산업 전문 인력은 대부분 러시아혁명 전부터 일해 오던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권의 산업화 정책에 미온적이었다. 이에 스탈린은 1928~31년 ‘부르주아 전문가의 반동행위 박멸’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새로운 전문 인력 양성에 힘썼다.

새로운 전문 인력 양성의 주안점은 계급 구조의 변화였다.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중하급 관리자들이 대거 전문 인력으로 충원됐다. 당원과 노동자들에게 대학 입학을 장려했고, 그 결과 1차 5개년계획 기간(1928~32년) 중 대학 재학생이 무려 세 배로 늘었다. 충성스러운 젊은 노동자들은 근무가 끝난 저녁에 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대학생의 절반가량이 현직 노동자였고, 노동자·농민 출신 대학생의 비율이 무려 3분의 2에 달했다. 스탈린 사후 최고 권좌에 오른 흐루쇼프는 바로 이 기회를 틈타 사회적 지위 상승에 성공한 대표적인 ‘스탈린의 신데렐라’다.

노동자·농민 출신 젊은이들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준 스탈린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당과 국가에 충성할 준비가 돼 있었고, 스탈린은 충성스러운 자기 사람들을 모든 산업 분야의 관리자로 배치해 의도한 대로 경제를 이끌 수 있었다. 사사건건 반기를 들던 부르주아 출신 관리자는 사라지고 대부분의 관리부서는 당과 국가에 충성스러운 ‘붉은 전문 인력’으로 채워졌다.

훗날 소련 사회의 특권계층으로 떠오른 ‘노멘클라투라’는 이렇게 형성됐다. 계급 없는 사회를 추구한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계급사회로 변질됐다. ‘전문성’보다 ‘충성심’이 강조된 결과 전문 인력의 연령은 현저히 낮아지고 업무 관련 교육 수준은 크게 떨어졌다. 훗날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어진 체제의 비효율성은 부분적으로 여기에서 비롯됐다. 실력과 전문성이 아닌 당파성으로 사람 고르기가 어디 사회주의 국가에만 국한된 일일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